Orbis Tertius
무한의 저편
소설

무한의 저편

본문

‘신이 그곳에 있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불과 몇 주 전이었다. 단순히 허황한 신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온갖 거짓이 나의 눈을 가렸고 무엇보다 중대한 진실로부터 나를 격리했다.’

광원이라고는 번쩍번쩍하며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화면뿐이었다. 그 외에는 시커먼 어둠이 잠식한 방에서 남자는 자유의 열쇠를 눈앞에 두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다. 등받이에 기대어 거의 눕듯이 앉은 그의 몸을 푹신한 쿠션이 푹 꺼지며 감싸 안았다. 그 방 안에서 남자는 그리 믿었다.

그의 삶은 평생에 걸쳐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그가 보기에 자신의 인생이 흘러가는 방향은 언제나 흐릿하여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다. 친구를 지키려다 폭력 사건에 휘말려 징계를 받았을 때도, 군에 입대하여 머나먼 타국의 전쟁에 파병되었을 때도, 항복한 포로를 고문하려는 상관을 제지하다 사건에 휘말려 불명예 전역을 했을 때도. 그는 중요한 갈림길에서 내렸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운명에는 큰 뜻이 있어 자신은 그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그마한 돛단배에 올라타 바람과 해류에 몸을 맡겨 그들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 것이다, 이따금 휘몰아치는 폭풍과 파도에 나름대로 저항하며.

그런 그는 허망한 현실의 굴레와 억압을 불살라버리라는 진정한 가르침을 받았다. 세계를 관통하는 진리가 전자우편으로 날아오리라곤 꿈에도 몰랐지만, 그는 이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항상 의문 가졌던 것들, 그 누구도 답하지 못했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그 전자우편에 적혀 있었다. 그는 그 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몸소 느꼈으며,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찾은 길은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보다 반가웠고, 가뭄의 단비보다 달았다. 남자는 자신의 도원경을 발견했다. 아니, 사람이 떠올리는 어떠한 이상향도 지금 그가 가고자 하는 곳에 비견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집단 자..."

그의 묵상을 깨는 불경한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는 리모컨을 거칠게 들어 신경질적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무지몽매와 모독의 고함이 세상을 가득 메워버렸다. 그러나 어찌 저들을 탓할 수 있으리. 그들은 그저 불쌍할 따름이다. 실로 악한 자들은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진리를 감추는 놈들이다.

그는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배를 당겨 허리를 일으켜 세우더니 무릎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괴었다.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터앉으며 정강이쯤 오는 높이의 탁자에 놓인 열쇠를 바라보았다. 진리의 열쇠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그는 그가 가장 익숙한 형태를 선택했다. 고전적이면서도 복잡한 기계, 그가 늘 품속에 지녀왔던 물건이 곧 열쇠가 되었다.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열쇠의 쇳몸에는 손으로 잡기 좋은 손잡이가 달려있었다. 오른손으로 열쇠를 들어 손잡이를 부드럽게 감싸 쥐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여느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는 열쇠를 쥔 손의 쭉 검지를 살짝 굽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손가락은 손잡이 근처 타원형의 구부러진 쇠로 만든 울에 쏙 들어갔다. 울 안에는 열쇠를 작동하는 자그마한 장치가 있었다. 남자는 손을 움직여 열쇠 손잡이 반대 부분을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수많은 기억과 단상이 잡념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지만 그 중 어느 것도 그의 의지를 가로막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며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남자는 손가락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손가락이 장치를 압력은 순식간에 임계점에 도달했다. 손가락이 장치를 덜컥 잡아당김과 동시에 열쇠가 굉음을 토해내며 불을 뿜었다. 열쇠 구멍에서 뛰쳐나온 약속의 징표가 그의 관자놀이를 통과해 수십조의 세포로 이루어진 구속을 분쇄했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느닷없이 달콤한 내음의 바람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남자는 눈을 다시 떴다. 그는 마침내 그가 추구하던 그 장소에 발을 디뎠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엘리시온에 눈물지었다.

신이 그곳에 있었다.


'오늘도 빌어먹을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겠군.'

고든은 퇴근해서 집에 들어간 날이 언제인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한창 키보드를 두드리던 그는 시커멓게 움푹 팬 눈을 거칠게 비볐다. 가상실험물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정문을 떠나며 다시는 연구실에 갇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맹세가 무색하게 연구와 개발로 밤을 지새우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는 그저 가상 실험 설계사로 일하며 카페인과 알코올을 수혈하던 연구자의 삶을 벗어나고 싶었다. 가상 실험 설계사는 단순히 고객의 요구에 따라서 가상 현실에서 실험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을 꽤 괜찮은 보수를 받으며 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봉과 경력 관리로 이루어진 현실의 벽을 외면할 수 없었다. 가상 현실 기술을 최첨단에서 선도하는 기업의 연구직 제안과 여섯 자리 숫자가 달러로 적힌 오퍼 레터를 그가 거절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의 완벽한 가상 세계가 등장하면서 대부분의 물리적인 실험은 시뮬레이션에서 이루어졌다. 원자 차원의 시뮬레이션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미시 세계를 탐구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가상 현실은 추상화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실제와 다른 원리를 통해 거시 세계를 실현했다. 이에 가상 세계는 현실을 완벽히 대체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엔터테인먼트와 콘텐츠 산업을 위해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여 상상과 공상을 구현한 가상 현실이 으레 주를 이뤘고, 그 외에도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존재하는 사물 대부분이 훨씬 더 낮은 비용으로 가상에서 재현되었다. 실제로 개발한 자동차의 안전성 검사를 위한 충돌 실험에서부터 건물의 내진 설계 시험, 신무기의 위력 검증까지, 이외에도 수많은 일을 가상 공간에서 현실보다 더 손쉽게 실행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수학적 계산에 의존하거나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야 가능한 것들을 실제로 해볼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수많은 학문이 이 현실의 거울과도 같은 도구에 힘입어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그는 대학원에서 했던 것처럼, 이런 가상 현실 기술을 한 단계 더 진일보시키는 연구를 맡게 되었다.

그가 그래도 회사에 가장 만족하는 점은 연구 주제 선정이 매우 자유로웠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자금은 무한한 것처럼 보였고 실제 매출에 관여하지 않아도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연구원 대다수는 선명한 결과가 도출되며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게임 등의 가상 현실 콘텐츠 산업 연구를 선호했다. 고든은 이왕 연구소에 취직하였으니 조금 더 학술적 연구에 가까운 주제를 원했다. 부푼 꿈을 안고 현재 연구 주제를 선정하여 프로젝트를 수행할 팀을 발족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와 협업하기 위해 팀에 합류한 연구원은 지금 자기 옆에서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는 한 명밖에 없었다. 고든은 그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동료를 한창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기지개를 켜곤 그를 불렀다.

"어이, 거기 형씨."

동료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의자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메이슨 마셜리(Mason Marshall-Lee) 라고 적혀 있는 자신의 명찰을 툭 건드렸다. 그럼에도 고든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능청스럽게 웃어넘기며 질문했다.

"시뮬레이션 재시동 준비는 됐어?"

"거의."

메이슨은 다시 작업하고 있던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가 보고 있는 화면에는 코드가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등을 맞대어 서로의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고든의 좌측이자 메이슨의 우측에는 연구실 한쪽 벽면을 꽉 채운 대형 스크린이 자리했다. 대형 스크린에는 끝을 알 수 없는 하얀색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새하얘서 원래라면 위, 아래의 구분도 없이 보여야 하지만 표면이 거칠거칠한, 타원형의 거대한 물체가 바닥에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정도는 간신히 분간할 수 있었다.

"코드 수정이랑 공기 세팅은 거의 다 됐으니 화면에 시계나 띄워줘. 실험은 바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고든은 그의 동료의 등에 대고 말했다. 메이슨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작업을 계속했다. 고든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모니터로 돌아봤다. 며칠 내내 키보드를 두드렸더니, 다시 타자하려고 하자 손가락이 저렸다. 그도 메이슨처럼 낡고 오래된 것을 선호하는 감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고대 유물이나 다름없는 키보드를 썼지만, 이번에는 다른 인터페이스를 써야겠노라고 느꼈다. 현시대의 모든 사람은 뇌에 고성능의 컴퓨터 칩을 설치하고 태어나며 이를 가지고 세상 대부분의 사물을 생각만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 칩은 마인드웨어(MindWare)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원래는 최초로 뇌와 컴퓨터를 연결한 회사, 뉴리얼리티(Neureality)의 상표명이었으나 곧 보통명사처럼 사용되었다. 그가 잠시 구상을 마치고 코드 구절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설계하였고 금방 작성하라는 명령을 마음먹자 화면에 해당 코드가 복사하여 붙여넣기라도 한 듯 쓰였다.

"바위까지 다 됐어. 시작해도 돼."

그 후로도 무언가 상스러운 단어를 중얼거리며 타자를 하던 메이슨은 마지막으로 리턴 키를 손가락으로 내려치며 말했다. 화면 속 회색 물체는 바위인 모양이었다. 바위 표면의 색상을 보아하니 화강암의 종류였다. 고든은 얼굴만 살짝 돌려 어깨 너머로 그를 바라보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는 마무리 작업을 하고 의자를 돌려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화면 속 바위의 위쪽에 빨간색 고무가 씌워진 스포이트가 생겨났다. 스포이트는 아무런 상호작용 없이 공중에 붕 떠 있었는데, 안에는 물처럼 보이는, 투명한 액체가 반 정도 찬 것처럼 보였다. 스포이트의 주둥이에서 액체가 조금 흘러나와 떨어질락 말락 맺히더니 이내 나름 큼지막한 방울이 되었다. 물방울은 저 가상 공간에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자유낙하를 하여 회색 물체에 부딪히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공중에 붕 떠 있는 스포이트를 제외하곤 너무나 현실적이었는데, 하나 특이한 점은 물방울의 낙하를 시각적으로 더 잘 보여주기 위함인지, 물방울의 꼬리가 반딧불처럼 빛났으며 그 빛의 잔상이 비행기의 항적처럼 길게 남았다. 떨어지는 물방울에서 멀어질수록 잔상은 희미했으므로 물방울과 꼬리에 달린 빛은 마치 별똥별을 보는 듯했다. 잔상은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고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서도 1초 정도는 더 허공에 남아있었다.

화면 우측 상단에 큼지막하게, 숫자는 초록색으로 표시된 전자시계가 나타났다. 특이한 점은 보통 시계는 시분초 세 단위를 가지고 여섯 개의 숫자를 보여줄 텐데, 이 시계는 숫자가 매우 많았다. 특히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모든 숫자는 두 자리씩 나뉘어 콜론으로 구분되었는데, 제일 왼쪽 마지막 단위는 10억 자리까지 표기될 수 있었다. 모든 숫자가 0으로 초기화되어 있었는데, 이내 가장 오른쪽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물방울이 스포이트의 주둥이에 맺히고 회색 물체로 떨어지는 일은 처음부터 끊임없이 반복되었으나, 그 간격이 점점 짧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몇 분에 한 번씩 떨어지던 물은 주기가 몇십 초로 줄어들었으며 눈에 보이는 낙하 속도도 빨라졌다.

"1분, 1초 동기화 완료."

메이슨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키보드로 무언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화면 속 시계의 두 번째 단위가 현재의 1초에 맞춰서 숫자가 하나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다만 물방울 꼬리에 붙어 궤적을 나타내는 빛의 잔상은 여전히 현실 시간 1초 동안 남아있었는데, 이는 가상 시간으로 1분 동안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더 가속해보자."

"1시간, 1초 동기화 완료."

이번에는 세 번째 단위의 숫자가 실제 초바늘의 움직임에 맞춰 숫자가 1씩 증가했다. 분 단위의 숫자가 증가하는 모양은 얼핏 보였으나 초는 이제 눈으로 좇기 어려워졌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져서 이젠 점선에 가까웠다.

"1일, 1초."

고든의 관제 없이 이번엔 메이슨이 실험을 계속했다. 물론 그가 무언의 동의를 요청하며 슬쩍 쳐다봤을 때 고든도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물방울의 흔적은 예광탄을 초당 수천 발 발사하는 기관포나 다름없었다. 1초에 수천 번 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지는 모습은 흡사 직선 형태의 낙뢰가 바위의 한 지점만을 연속해서 강타하는 것 같았다.

"1년."

이제 물방울의 자취는 직선으로 보였다. 초당 수백만 번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으니 빛줄기는 사실상 광선이 되었다. 스포이트에서 출발한 레이저가 바위를 쪼갤 기세처럼 보였으나 실제론 그저 물방울이 떨어질 뿐이었다.

"좀 깎이기 시작했어."

고든이 자신의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를 확인하며 말했다.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웠으나 바위는 아주 조금씩 깎여 나갔다. 1년 동안 떨어질 물방울이 1초 만에 떨어지는 셈이었으니 사람이 감지할 만큼 충분히 짧은 시간 내에 바위의 상태가 변했다.

사람들은 흔히들 수적천석,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격언 종종 입에 올리곤 한다. 노력이나 끈기를 강조할 때 비유를 들어 사용하는 말이다. 하노이의 탑 이야기가 내포하는 억겁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유구한 세월 그 자체를 일컫기도 하는데, 그것이 그들이 지금 실험하고 있는 배경이었다. 매우 긴 시간을 시뮬레이션하면서 그들이 개발한 가상 현실의 시간 가속 기술을 시험하고자 했다. 그들은 화강암 따위의 바위를 만들어 그것에 물을 지속해서 떨어뜨린다면 100만 년에 2미터가 침식된다고 가정하고 물방울로 바위에 5미터의 구멍을 뚫는 시뮬레이션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몇백만 년의 세월을 현실 시간 기준으로 얼마나 압축할 수 있을까?

"여기까진 괜찮군."

"100년으로 올려도 되겠어."

고든의 제안에 메이슨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는 입을 오물거리며 손바닥을 옷소매에 비벼 흥건한 땀을 닦아내었다. 고든은 그가 어물거리는 것을 보채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며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고든도 긴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며칠 면도를 못해 턱에 난 까끌까끌한 수염을 연신 만지작대었다.

1년을 가속하는 수준까지 도달하기도 대단히 어려웠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시도와 실패가 있었다. 그러다가 몇 달 전 프로파일링(프로그램의 최적화를 위한 분석 방법)을 통해 성능 저하의 문제점을 발견하여 코드를 수정한 결과 1년까지는 무리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더 큰 시련이 존재했다. 마의 100년, 두 사람은 그렇게 불렀다. 1년 가속도 실용 사례는 충분했다. 스페이스 오페라 작품의 세계관을 구현한 가상 현실 게임에 빠져들어 인류를 구원할 20년의 모험을 떠나도 현실에서는 20초만 지날 뿐이니까. 이에 반해 생물의 진화과정은 몇십, 몇백만 년이 걸리고 태양의 탄생과 최후까지, 그 일생은 대략 몇십억 년이 소요되었다. 1년이 1초라고 가정해도 500만 년은 두 달, 80억 년은 약 254년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단발성의 실험보다는 다양한 변수를 바꿔보는 반복 실험이 필요한데, 장구한 세월의 시뮬레이션은 웬만한 가속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100년, 1초."

메이슨이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의 의지가 느껴졌다. 메이슨은 아까처럼 한꺼번에 증가시키기보다는, 점진적으로 수치를 조정했다. 그에 따라 화면 속의 물체들은 차근차근 변해갔다. 수치만으로 검증되던 바위의 침식은 사람의 눈으로도 감지될 만큼 빠르게 이루어졌다. 물방울이 낙하하는 바위의 중앙은 점점 빠르게 움푹 파여갔다.

고든과 메이슨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에서 성공의 기쁨이 단잠에서 깨고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잇따른 실패가 폐부 깊숙이 찌르는 비수를 맛보았음에도 여전히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마음이 움텄다. 20초가 지나자, 최고 속도에 도달, 즉 현실의 1초가 시뮬레이션의 100년에 동기화되었고 1분가량이 지나자 그들은 이미 자축할 준비를 하며 속으로 성취의 환희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기대는 곤두박질쳤다. 화면에 보이는 가상 세계의 모든 물체가 갑자기 시간이 정지한 듯, 영상을 일시 정지한 것처럼 멈추어 섰다. 물방울의 궤적을 따라가는 빛부터 시작해서, 물방울 또한 어디 매달리기라도 한 듯 허공에 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다시 물방울이 움직였다. 떨어진다기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솟아오르는 듯했다. 물방울 낙하 실험을 처음에 가속했던 것처럼 물방울이 솟구쳐오르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더니 이제는 새살이 돋아나듯 바위의 푹 꺼진 부분이 차올랐다. 마치 되감기를 하듯 시간이 거꾸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몇 초 후에는 다시 비슷한 속도로 물방울이 낙하하여 바위에 구멍을 내었다. 그러고 나서는 시간이 앞으로 가는 것도, 뒤로 가는 것도 아닌 것이 제멋대로 마구 움직이는 듯했다. 시간이 가속된 정도가 워낙 높아서 물방울이 내려가는지 올라가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바위를 살펴보니 무작위적으로 순식간에 파였다가 차오르기를 반복했다. 둘은 동시에 한숨을 쉬거나 혀를 차며 실험을 멈췄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실패였다.

"미치겠네, 또 실패군."

메이슨과 고든은 김이 빠진 채로 화면을 응시했다.

"낙숫물 실험만으로도 이런데, 규모가 커졌다간..."

"지질학자들이 유라시아 판과 인도판을 실제로 충돌시켜보고 싶다던데."

"꿈에서나 하라 그래."

고든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렇게 조그마한 실험도 문제가 있는데 히말라야의 융기 과정을 지켜보자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왜 또 이렇게 됐지?"

"일단 지금 우리가 가진 자원으로도 연산량이 부족하더군. 서버 증원은 불가능하다고 했지?"

"아니."

"더 준다고?"

메이슨이 화들짝 놀라며 반색했다.

"그게 아니라."

고든이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휘젓자 메이슨은 또 교수님 납셨다며 툴툴대었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꼭 나오는 고든의 버릇이 몇 가지 있었다. 그는 언제나 턱을 매만졌고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다. 그러고는 분명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이고 이에 대한 해법을 제대로 알 리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는 이전 방법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착상을 제안하거나 제법 그럴싸하게 아는 척하며 신선한 방식을 도입하자고 역설했다. 메이슨은 항상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풀면서 훈수하는 아저씨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는 하나씩 나오는 오류의 예외 처리로는 안 돼."

"그런가? 그래도 1년 가속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었잖아."

메이슨도 고든이 말하는 것처럼 출현하는 문제점을 주먹구구식으로 하나씩 직접 대응하는 미봉책에 염증을 느꼈다. 그렇지만 다른 뾰족한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사람이 큰 병에 걸렸다고 치자.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게 상책 아니겠어?"

고든이 말을 이었다.

"구조를 전면 재검토해야겠어. 최적화부터 새로운 로직까지. 신선하게, 다시 구상해보자."

"그거야 뻔한 얘기지. 문제는 그게 어디 쉽냐는 거야."

증상에 대응하여 치료하는 대증요법 대신 근본적 치료에서 착안한 이야기였다. 결핵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열과 기침을 잡는 데 힘을 쏟기보다 결핵균을 체내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이슨의 말대로 병의 근원을 발본색원하기는 힘든 경우가 있다. 프로그래밍의 디버깅도 마찬가지였다. 덩치가 커진 프로그램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근원을 찾고, 또 그것을 일소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메이슨이 생각하기에 그의 해결책은 너무나도 이상론적이었다. 이미 잘 닦인 길이 있는데 새로 시작하자는 말과 같았으니까. 그는 바로 앞에 목적지가 있는데 멈추고 선회하는 것은 아니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걱정하지 마, 아예 다 갈아엎고 새로 짜자는 건 아니야. 염두에 둔 부분이 몇 가지 있어."

그럼에도 메이슨이 고든의 말을 곧잘 듣는 이유는 분명했다. 고든의 통찰력이 늘 문제 해결에 꽤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진전이 더디고 문제 해결이 지지부진할 때 고든이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언제고 직접적인 해결책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분위기를 환기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아이디어를 강구할 때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었다. 물론 그는 석사고 고든은 박사인 점도 한몫했지만.

고든이 내리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이번에는 훨씬 더 전체적인 부분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전반적인 설계에서부터 시뮬레이션의 성능과 실행속도에 직결되는 최적화까지. 고든이 내놓은 아이디어의 규모가 꽤나 방대해서 지엽적인 부분까지는 거론하지 못했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메이슨은 특히 어느 대목에 이르러서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든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렇게 시간은 밤까지 흘렀다. 이쯤 되면 처음에는 집중했던 메이슨도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만했는데, 그는 고든의 아이디어를 듣고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그의 컴퓨터 앞에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고든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이번 주는 집에 가야겠어. 이러다 사람 잡겠다."

"그래."

"다음 주부터 다시 해보자."

고든이 일어서서 짐을 챙겼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집에 가져갈 물건을 가방에 있는 대로 쑤셔서 넣으니 가방이 부풀어서 둘러매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메이슨은 그러든지 말든지 이미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몰두한 상태였다.

"너도 적당히 하고 퇴근해. 그러다 쓰러진다. 아, 그리고 영상 통화 안 된다고 했지? 급한 일 있으면 음성 연결이라도 해."

메이슨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 나름대로 알겠다는 표시였다. 혹은 귀찮으니 방해하지 말라는 몸짓일 수도. 고든은 그의 굽은 등을 바라보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말을 해도 지금 그에겐 닿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항시 연구에 진심이었으니까. 그 누구보다 연구에 있어서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자신의 성과에 가지는 애착이 컸다. 그가 봤던 어떤 사람들보다도 연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은 연구와 프로그래밍을 위해 태어난 기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러면 뭐 다음 주쯤에는 돼 있겠는데.'

실없이 킬킬거린 고든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발길을 돌려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오늘은 왠지 발걸음이 가볍다. 고든은 회사 입구로 들어가 연구실을 향하며 마인드웨어가 측두엽에 직접 연주하는 곡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랜만에 주말을 포함해 나흘이나 쉬었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오늘은 그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평소였으면 수십 가지의 보안 장치를 통과하는 가운데(마인드웨어를 통해 자동 인증되어 딱히 귀찮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보안 통로부터 짜증이 치밀어올랐겠으나 지금은 달랐다. 고든은 자신의 연구실에 다 와서 문이 보이자, 생각으로 명령해 노래를 껐다.

[고든 오도넬, 신원 인증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고든의 시야 정중앙에 그의 이름이 담긴 인증 메시지가 나타났다. 칩이 그에게만 들리던 노래처럼 자신만 보이도록 시각 피질을 자극한 것이었다. 연구실의 자동문이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양쪽으로 갈라져 열렸고 동시에 메시지도 사라졌다. 그가 들어가도 언제나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인사하던 메이슨이 놀랍게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좋은 신호일 리가 없었다.

"어이, 고든!"

메이슨이 그답지 않게 흥분하며 외쳤다.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긴 것을 보니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주말에 왜 전화를 안 받아!"

퇴근한 사람에게 전화를 안 받냐고 따지는 것에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메이슨이 너무도 당당하게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오히려 고든은 뭔가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연구실 나서기 전에 급한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는 했지만, 그건 모두가 으레 빈말로 하지 않던가?

"아니, 뭐..."

순간 아무리 그래도 이럴 관계는 아닌데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고든은 자신도 모르게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아이처럼 움츠러들며 변명에 가까운 눈치로 말을 얼버무렸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하긴 연락이 안 되는 게 한두 번이어야지."

메이슨은 콧방귀를 뀌고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고든은 영문도 모른 채 한 소리 들어서 그런지 아직 어리벙벙한 상태였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자리로 가서 가방을 내려놓을 때쯤 등 뒤로 메이슨의 호통이 들렸다.

"왜 이렇게 뭉그적거려?"

"아, 알았어. 그만 좀 화내."

고든이 투덜거리며 돌아보자 이리 오라며 메이슨이 손을 까딱했다. 고든이 다가오자 메이슨은 화면을 가리켰다. 들어오면서도 눈에 띄었지만, 연구실에서 퇴근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화면 그대로였다. 실험을 개시하기 전, 바위와 물이 반쯤 차 있는 스포이트. 고든이 멍하니 화면을 쳐다보고 있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바로 실험이 시작된 듯 스포이트에서는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는데, 바로 100년으로 가속했는지 바위가 파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고든이 제법 놀란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자 메이슨은 턱짓으로 다시 화면을 보라 일렀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100단위의 숫자가 휙휙 올라갔고 이내 화면 오른쪽 위의 전자시계는 10000년을 돌파했다. 다시 말해, 현실 시간 100초를 이미 지나간 것이었다. 고든은 그걸 확인하고 씨익 웃었다.

"역시! 해낼 줄 알았다니까!"

"아주 점쟁이가 따로 없군."

메이슨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아니, 이 친구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고든이 멋쩍은 듯이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알아, 농담해본 것뿐이야.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 고든."

메이슨이 캘캘 대며 고든의 어깨를 툭 쳤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지 않으면 웃지 않던 그가 입이 귓가에 걸린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키보드로 무언가 조작했다.

"이것 봐."

메이슨이 화면을 가리키며 말하자마자 변화가 생겼다. 마치 카메라가 이동하듯 매끄럽게 시점이 바뀌어 스포이트 위에서 바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스포이트도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천천히 움직여서 전체 윤곽을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고든은 처음에는 그림이라도 그리는가 싶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거대한 바위에 스포이트를 움직여 글씨를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커다란 바위에 레이저로 조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가속과 동시에 여러 물체의 움직임까지도 자유자재로 가능한 모양이었다. 고든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메이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메이슨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며 검지를 까딱였다. 그가 다시 키보드를 만지작거렸고, 이번엔 아예 다른 영상이 화면에 연출되었다. 이번에는 가상 세계라는 것을 알리듯 모든 것이 새하얀 세상은 아니었다. 얼핏 보면 지도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면 그래픽으로 전부 입체감 있게 구현된 가상의 땅덩이였다. 화면에서 보이는 땅덩이는 아래쪽은 녹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위쪽은 듬성듬성 녹색이 점처럼 박혀 있는 회갈색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푸른색 선과 큰 점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강과 호수인 모양이었다. 그중 가장 좌측에 있는 한 호수에서 여길 주목하라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고든이 그곳에 눈길을 주자 그 호수를 발원지로 삼는 강이 화면 전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빠르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강을 따라 지층이 침식되어 계곡이 형성되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아주 단순하고 제한적인 환경에서 벗어나서, 메이슨이 거대한 규모의 시뮬레이션에서 엄청난 수준의 시간 가속을 구현해낸 것이었다. 이번에는 화면이 확대되면서 계곡을 형성하는 강이 점점 크게 보이더니 마치 협곡에 서서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강이 스스로의 활로를 개척하며 땅을 잠식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고든은 감탄하며 연신 손뼉을 쳤다.

"대단해! 여긴 어디지? 지구인가?"

"티베트고원의 얄룽창포 대협곡. 누가 시뮬레이션 모델을 만들어 놓은 게 있더라고. 가져다 썼더니 잘되네."

"확실히 다른 시뮬레이션 구현체랑 호환도 훌륭하군. 보니까 한두 개를 해본 게 아니네?"

고든이 환하게 웃으며 메이슨의 어깨를 연신 두드렸다. 그가 한 실험 목록을 보니 지금 자신에게 보여준 협곡 시뮬레이션 말고도 수백 가지의 대규모 성공 사례가 더 있는 듯했다. 메이슨은 시뮬레이션을 정지하고 기지개를 쭈욱 켜고는 고든을 돌아봤다.

"이번에도 네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지. 어떻게 안거야?"

그가 팔꿈치로 고든의 옆구리를 툭 치며 넌지시 물어봤다.

"난 그냥 옆에서 몇 개 떠든 것뿐인걸. 실제로 한 건 너지."

그가 겸양하듯 말하자 메이슨이 옆에서 실눈을 뜨며 재수 없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든은 그 모습을 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뭐, 대부분은 실험 준비하면서 혼자 따로 해보고 있었어."

고든이 어깨를 으쓱대었다.

"그리고 박사쯤 되면 너도 할 수 있을걸? 물론 코딩 실력은..."

"됐어, 거기까지."

메이슨이 고든의 너스레에 머리를 휘휘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그도 자신 못지않게 프로그래밍 실력이 좋으면서 저리도 앓는 소리를 하는 행태는 도저히 못 봐줄 것 같았다. 메이슨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아직 상용화는 힘들어. 서비스 단계까지 나가긴 쉽지 않을 거야."

고든이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라 여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한적 환경에서의 첫 실험 성공이었지 아직 모든 개발이 마무리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순히 사용자를 위해 서비스로 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구를 논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도 엄격한 검증 과정과 형식적이고 절제된 실험이 필요했다.

"그래. 그럼 테스트 겸 우리가 원래 하려고 했던 실험을 진행해보자."

"그 실험?"

"규모도 크고, 사람들 시선도 확 사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입이 떡 벌어지게 해주자고."

연구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단순히 연구의 성과만이 아니었다. 특히 가상 현실과 같이 대중에게 밀접하고 첨단을 선도하는 분야는 그 연구의 결과를 얼마나 잘 홍보하느냐가 매우 큰 요소였다. 연구의 결실을 화려한 실험과 압도적인 결과물로 얼마나 잘 뽐내냐에 따라서 이목이 쏠리고 눈길을 받는 정도가 달랐다. 대중의 관심은 프로젝트의 예산과 재정에 직결되는 문제였고, 이는 연구가 탄력을 받아 더 수월하게 전진함을 상징했다. 학술적 연구에 집중하고 싶었던 그였지만 변두리의 설움을 톡톡히 느꼈는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뭐..."

메이슨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개인 사정으로 박사 과정을 중단하고 석사 졸업으로 연구실 생활을 아쉽게 끝낸 그는 고든보다도 연구에 목말라 있었다. 정확히는 가상 현실 분야에서 논문을 써서 제1저자로(이번에는 공동 저자겠지만) 출판하는 것이 목표였다. 특히 이번 연구는 현재 가장 저명한 학회에 제출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는 고든이 말한 실험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그가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실험 자체는 나름 흥미로웠으나 꽤 길고 고된 과정이 필요했다.

"알아, 논문 빨리 쓰고 싶은 거. 나도 마찬가지야. 근데 들어봐."

고든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속에 있는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을 셈이었다. 그는 자신들의 실험에 꾸준한 결과가 따르긴 했지만, 한동안은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해 꽤 조바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물론 논문도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것보단 이 기술을 이용하여 다채로운 실험을 해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지금 게임에 들어가는 가상 현실 시간 가속은 그들의 가속 기술에 비하면 그저 미개한 수준이었다. 더 실험해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본 모습만 해도 그러했다. 그의 눈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엿보였다.

"알았어, 해보자."

메이슨은 고든의 끈질긴 설득에 혀를 내두르며 백기를 내걸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문명 실험 맞지?"

"맞아. 인공 생명을 결합한 문명 시뮬레이션."

가상 현실 기술과 더불어 또 하나의 특이점은 인공 생명의 탄생이었다. 시뮬레이션의 발달은 인공지능이 인공 생명으로 진화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살아있는 생물의 뇌와 학습 및 성장 과정도 시뮬레이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인공 생명에게 줄 수 없는 다양한 정보와 상황을 시뮬레이션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시간 가속이 없어도, 인공 생명의 학습 속도는 인간과 궤를 달리했으므로 인공 생명의 진화는 날개 돋친 듯 급속도로 이뤄졌다. 그들은 삽시간에 인간을 뛰어넘는 성과를 일구어냈고 빠르게 인격으로 인정받아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학계에서는 그들의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존재론적인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실제 생물과 동치라고 볼 수 있을지, 유기체의 신경계와 일치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현실과 시뮬레이션은 다르니 인간과 아무리 비슷하게 만들어도 다른 생물로서 기능한다는 측, 거의 비슷한 물리법칙 하에 뉴런부터 인간과 동일하게 설계했다고 가정한다면 기존 생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측, 정확한 검증이 어렵다는 측 등 다양한 의견이 난무했고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합의된 내용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든이 고안한 문명 실험은 이런 논란을 차치하고, 가상 행성을 만들어 인공 생명을 인간이라 가정한 다음, 시뮬레이션을 통해 유구한 세월 동안 그들의 문명 발전을 관측해보자는 것이었다. 수많은 인류학자와 사학자들에게도 꿈과 같은 이야기이지만 문명을 다루는 게임이 과거에 큰 인기를 끌었을 만큼 대중에게도 흥미로운 주제임이 분명했다.

"음."

메이슨은 고든이 과장된 몸짓으로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시뮬레이션 내 인공 생명을 인간으로 상정한다는 전제부터가 학술 가치에서 벗어난다고 메이슨은 주장했다. 그는 그저 유희 거리에 불과한 실험이 아니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메이슨은 그런 생각을 뒤로 하고 군소리 없이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추가로 아이디어가 하나 더 있어."

"아이디어?"

고든은 메이슨의 반응을 보며 그가 눈을 이렇게까지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메이슨은 그럴 거면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게임이나 만드는 게 어떠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입술만 삐죽일 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고든은 그 모양새를 보고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던 티를 내더니 이내 입을 뗐다.

"그럼 일단 시작이나 해보자. 그다음 다시 얘기해보자고."

"그래."

"실험은 여러 번 반복해야 하니까 여유 자원은 좀 남겨놔."

메이슨도 고든이 한 발짝 물러선 태도가 썩 맘에 들었는지, 어깨를 으쓱하더니 군말 없이 실험 준비에 착수했다. 조금 더 구체적인 실험의 시나리오를 엮을 요량으로 두 사람은 의논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밤이 깊어 갈수록 둘의 논쟁은 더욱 불이 붙었고, 그 과정에서 단순해 보이는 착상이 서서히 윤곽이 잡혀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더욱 열의를 불태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 시뮬레이션이 장구한 세월 동안 어떻게 인류가 이 문명을 이룩했을지에 대한 탐구라는 주제를 정확히 조준하기 위해 정교하게 가상 현실을 설계했다. 시뮬레이션 속 문명을 일궈낼 인공 생명, 고든과 메이슨이 상정한 가상 인간은 인간과 최대한 동일하게 제작되었다. 유전자와 뇌의 뉴런 단계부터 철저하게 인간을 모방하였고 심지어 생식 과정상 DNA의 돌연변이 확률 따위의 정밀한, 그러면서 근본적인 부분까지 헤아렸다. 물론 실험의 초기조건, 즉 실제 문명의 맹아 당시 현실에 실존했던 인류의 조상과 이 시뮬레이션에서 배치된 가상 인간은 개체 단위에서 달랐기 때문에 발전의 방향성이 일치한다고는 해도 훗날 완벽히 같은 개인, 인물이 출현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들은 이 실험이 현실 세계의 방향성을 어렴풋이나마 따라가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상 환경은 인간뿐만 아니라 그들이 거주할 행성도 지구와 일치하게 구현되었다. 지각, 바다는 이미 다른 많은 시뮬레이션에서 사용되었으므로 손쉽게 데이터를 구할 수 있었으며 대기권과 자기장 등의 요소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가상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행성의 대기권 내 환경뿐만 아니라 대기 밖의 여건도 있었다. 밤하늘의 별과 태양, 달을 비롯한 모든 천체가 인간의 상상력, 시간 개념, 종교 등 문화 전반에 걸쳐서 큰 영향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영향 말고도 조수 간만의 차 등 태양과 달이 지구에 미치는 물리적인 영향도 아주 심대했다. 현재의 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태양계 내부는 가능했지만, 그 바깥의 은하와 천체들까지 포괄하는 범위, 현재 관측 가능한 우주 전체의 시뮬레이션은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태양계 내부까지만 시뮬레이션에 포함하고, 나머지 바깥 우주는 태양계를 둘러싼 구를 제작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상 인간들이 목격해야 하는 밤하늘에 맞춰서 그 구에 태양계 바깥 우주를 영상처럼 투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즉, 지구에서 보이는 심우주와 모든 천체를 전부 직접 구현하기보다는 가상 인간들이 실제 볼 수 있는 밤하늘인 우주를 태양계 크기의 플라네타리움으로 만든 것이다. 우주의 움직임은 이미 가상 세계와 시뮬레이션의 발달로 꽤 오랜 시간의 시뮬레이션 결과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행성과 비슷하게 비교적 손쉽게 개발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실험의 시작 시간을 네안데르탈인이 확실히 멸종, 현생 인류에 흡수되었다고 여겨지는 기원전 20000년 전으로 설정했다. 최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생물군을 포함한 당시 지구의 환경을 조성했다. 모든 생물체는 가상 인간과 같은 원리의 인공 생명을 기반으로 구현되었으며, 생물종 전체를 만드는 일은 너무나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미 다른 시뮬레이션에서 사용되거나 검증된 자료, 자사의 에셋이나 오픈 소스를 사용했다. 마지막으로는, 당시 지구의 인구 분포에 맞춰서 가상 지구에도 가상 인간이 배치되었다.

몇 날 며칠을 밤새워 책과 인터넷을 뒤졌으며, 심지어 그들이 참고한 논문 저자들에게 집요하게 메일을 보내 조언을 얻은 결과, 다양한 근거와 시각의 교차 검증을 통과할 수 있었다. 실험의 세부적인 종료 조건은 실험마다 다르게 설정되었지만 모든 실험이 공유하는 기준은 하나가 있었다. 시뮬레이션 문명의 한계가 그 기준이었는데, 그들은 이를 가상 인류가 태양계 외곽으로 유인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시뮬레이션 내에서 시뮬레이션이 등장한다면, 그것이 현실과 같은 수준으로 도달했을 때로 삼았다. 그때부터는 시뮬레이션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계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실험은 여기서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자잘한 세팅을 바꿔가며 수십 번, 수백 번도 넘게 수행되었다.

그들이 수많은 실험을 거치도록 얻은 결과는, 시뮬레이션 내 문명의 발전이 현실과 비슷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대부분은 실제 역사와 동떨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맞았다. 문명의 개화를 크기와 방향을 가진 벡터라고 본다면, 그 벡터가 시뮬레이션과 현실에서 크기나 방향이 동시에 일치한 적이 매우 드물었다. 고든과 메이슨도 가상 세계에서 반드시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수메르 문명이 발원하고, 이집트에 피라미드가 건설되며 이탈리아반도에 로마 제국이 탄생해야 한다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적어도 지극히 같은 환경이라고 가정했으므로 대략 한 세기 단위로는 현실과 비슷한 수준의 전개를 예측했다. 신석기 시대에 농경 사회가 시작되고 이후 도시가 발생하며 철학과 사상, 예술이 융성하고 산업혁명과 정보화 시대를 거쳐 21세기 중반, 흔히들 말했던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까지. 그러나 시뮬레이션은 그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어버렸다.

어떤 실험은 방향성은 비슷하나, 속도가 너무 느렸다. 어떤 경우는 가상 인류의 인권, 문화를 포함한 전체적인 생활상을 바탕으로 파악한 속도는 비슷했으나 방향이 극히 달랐다. 새로운 철학과 예술의 개척으로 물질적인 문명보다는 정신적인 문화가 발달한다든지, 전체 인류가 통일왕조 하나 아래 묶여 오랜 시간 동안 왕정이 유지되는 사례도 존재했다. 전자의 경우 흥미로운 문학 작품이 시뮬레이션 내 문명에서 탄생하였는데 현실로 복사해서 출판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SF 작가들의 선견지명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런 문명들은 마치 SF 작품에서 묘사되는 세계도 출현했다. 초광속 기술을 개발하고, 생명 공학 기술로 거의 모든 병을 치료하는 등, 현실의 기술을 초월하며 눈부신 번영을 이룩하였다. 물론 현실과 가상 세계의 차이는 명료했기 때문에 이 시뮬레이션의 가상 인류가 가진 기술을 그대로 실제 현실에 옮기는 일은 힘들었다. 그런 기술의 상당 부분이 인류가 상상했던 것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많았기 때문에 메이슨과 고든은 이 가상 인간들의 발버둥에 꽤 신선한 충격과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실험에서 인류는 자멸했다. 원시적 사회에 안주하여 진보를 멈춰버리기도, 눈부신 기술적 발돋움을 이뤄내기도 한 문명들의 대다수가 스스로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 기술력의 성장이 늦어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못 이겨 사회가 붕괴하기도 했다. 현재 인류와 아주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했던 문명들은 상당수가 전쟁으로 무너졌다. 아무리 가상 인류라지만 핵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이 증발하고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꼴은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외에도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한 결말이 즐비했다. 며칠 간은 이런 결과를 막아보고자 고든과 메이슨은 밤을 새워가며 초기 설정을 수정해보는 재실험을 진행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임을 어느 순간에 깨달았다.

인간 사회는 너무나도 복잡한 데다가 지극히 유기적인 시스템이었고 실험의 결과로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도 없었다. 마치 나비 효과처럼, 초기조건을 조금만 비틀어도 문명의 성립은커녕 흔히 이야기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로 수렴하기 일쑤였다. 당연하게도 미시 세계를 구현하지 못하는 이상 가상 세계와 현실이 완벽히 거울 같을 수는 없다고 인지하고 있었으나 시간 가속으로 인해 유구한 세월 동안 오차가 조금씩이라도 쌓이니 그 괴리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가상 현실에서 게임을 즐기는 정도의 가속으로는, 이렇게 오랜 시간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도, 그럴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아 파악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당연히 시뮬레이션과 현실의 차이를 고려해서 전체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재설계하면 현실과 매우 흡사한 시뮬레이션을 구현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시뮬레이션의 세팅을 입력(혹은 정의역), 실제 시뮬레이션 결과를 출력(혹은 공역)으로 두고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함수로 본다면 이 함수가 특정 출력값(현실과 같은 시뮬레이션 결과)을 갖도록 하는 입력을 찾는 최적화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함수의 특성, 즉 입력과 출력의 관계 자체를 추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므로 가용한 모든 컴퓨터, 인공 생명의 자원을 이 우주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투입해도 그런 이상적인 설정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여기까지로 만족하고 논문 작성이든 결과 공개든 그다음 단계를 수행하더라도, 기술 개발과 흥미로운 발견,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성과를 거둔 것이었으나 어떤 오기가 생겼는지 그들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고든은 이 문명 시뮬레이션을 평행 우주, 혹은 다중 우주 시뮬레이션이라고 해석했다. 시뮬레이션 보여준 수천 가지의 세계, 그 우주 하나의 극히 작은 개인이 쓴 소설만 해도 현실의 인터넷에 공개하니 대단한 인기를 끌며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데, 분명 문학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문화에 걸쳐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할 무한한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었다. 또한 현실을 뛰어넘는 기술이 시뮬레이션 내에서 등장한다면 이 현상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확답할 수는 없었지만 학자들에게 적어도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고든은 그들 자신이 새로운 학문, 아니 우리가 갇혀 있는 개념을 뛰어넘을 무언가의 창시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이슨은 동감하면서도 다른 실험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그는 오히려 실용적으로 보건대, 인류가 왜 자멸했는가에 대해서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아무리 시뮬레이션과 현실의 괴리가 크다고는 하지만, 상당수의 시뮬레이션 결과가 문명의 멸망 및 붕괴라는 결말로 다다르는 것은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으냐고 주장했다. 메이슨의 견지도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류의 존속에 관한 관심은 커져만 갔다. 옛날보다 환경오염으로부터 제법 자유로워진 오늘날에도 전쟁이나 멸망의 위협은 실재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난 고든은 줄곧 자신이 예전부터 궁리했던 아이디어 하나를 조심스럽게 제시했다.

그들이 만든 가상 우주 상당수가 멸망한 원인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결국 핵심적인 하나의 원인이 존재했다. 판단의 오류, 그것이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한 세계에서는 어느 초강대국의 수뇌부가 적국의 미사일 발사를 감지하는 인공위성의 오작동을 의심 없이 믿고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일이 핵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른 세계에서는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기후 변화에 너무나도 낙관적이었고 결국 임계점을 지난 뒤에야 부랴부랴 온갖 규제를 마련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대부분의 대지가 바다에 잠기고 식량 부족과 사회의 붕괴로 인류는 자멸했던 것이다. 현재 인류와 굉장히 흡사하게 진화해 온 세계는 현실과 달리 인공 생명에 대한 강력한 안전장치가 없어서 인공 생명과 인류 사이에 분쟁의 불꽃이 튀었고 이는 곧 전쟁이라는 화마로 번져 인류는 인공 생명의 배터리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소행성의 접근을 잘못 판단하여 격추 시점이 너무 늦는 바람에 지구와 충돌했고, 그대로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

고든은 이들과 같은 사례를 들며 문명 시뮬레이션에 한가지 요소를 추가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우리 같은 일반 인류가 아니라 현재 현실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공 생명의 수준으로 초지능의 가상 인간 하나를 시뮬레이션에 추가하자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시뮬레이션 내, 즉 가상 지구에서 천재지변까지도 일으킬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주어, 이른바 관리자로 삼는 것이었다. 메이슨은 이 요소가 무슨 의미가 있냐며 의문을 가지자, 고든은 이 관리자에게 시뮬레이션 문명이 우리 인류와 비슷하게 발전하도록 미리 지식을 심어 두고 인류가 판단의 기로에 섰을 때 합리적인 선택을 유도하도록 간접적으로 개입하면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실험이 진행될 것이라 기대했다. 메이슨은 그의 제안에 거부감이 컸는데, 안 그래도 큰 현실과의 간극을 더 늘리는 주먹구구식의 요소일 뿐이라며 일축했다. 이에 맞서 고든은 그가 말한 시나리오는 해당 요소를 활용할 수 있는 한 가지 방편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러자 메이슨은 일종의 절대적 존재, 전지전능한 신을 모사하자는 주장이라면 논점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며 오락적인 내용만 더 강조된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 사이의 입장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낮에 시작한 격론이 밤을 지나 새벽녘에도 이어졌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도중, 메이슨이 급히 고든의 말을 제지했다. 그는 갑작스레 입을 다물고 무언가 골똘히 고심하는 체했다. 고든은 자신이 제시했던 고안 중 무엇에 그가 이리 반응하는지 되짚어 보았는데, 아무래도 철학 운운한 말과 관련된 모양이었다. 그는 시뮬레이션에서 신적인 존재를 구현한다는 것은 단순히 가상 우주의 길잡이로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신이라고 가정한 관리자의 사고 과정이나 행동양식을 살펴본다면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 주제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존재와 그들이 개발한 가속 기술을 어떻게 엮어야 연구적으로 괜찮은 줄거리가 될지는 여전히 고민거리였다.

고든이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다가 꾸벅꾸벅 졸 무렵, 메이슨이 침묵을 깨고 그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의 구상은 대단히 간단했다. 신적인 존재를 창조하여 실험을 해보자는 발상에는 동의하나, 문명을 운영한다는 목표보다는 신 시뮬레이션이라는 별도의 실험 계획을 설립하고, 철저한 통제 아래 억겁의 세월 동안 이 초지능의 객체가 순수한 자기 사유만으로 어떤 존재로 거듭나는지 관찰하는 이야기였다. 고든은 그의 동료가 첫 번째로 고려했던 목적, 인류의 미래와 멸망에 대한 고찰과는 비교적 동떨어졌지만 나름 구미가 당기는 주제가 되리라 예상했다. 따라서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과 병렬적으로 진행하는 것에 합의했다. 다만 즉흥적으로 설계한 실험이기 때문에 고든은 다음과 같은 두 조건을 제안했다.

첫 번째, 해당 객체가 가상 세계, 시뮬레이션에서 사유한 모든 것이 여과 없이 명령으로 간주되지 않아야 했다. 이는 현실에서도 나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요소였는데, 초지능의 사고는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러므로 통제 불가능할 위험성이 있었다. 더불어 실질적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어떤 일이라도 가능하도록 구현하는 일의 복잡도와 연산량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두 번째는 신이라는 존재의 권한에 관련된 것이다. 프로그램 설계상 그의 권한이 동작하는 범위는 현재 두 사람이 만든 시뮬레이션 내에 국한되었다. 그럼에도 혹시 모를 위험성 때문에 신 시뮬레이션은 컨테이너라는 공간 내부에서만 시행되어야 했다. 현실의 인공 생명은 가상 공간에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인간보다 손쉽게 사회 기반 시설에 접근하거나 가상 현실에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을 제약하기 위한 규제가 필요했고, 그 방책으로 등장한 것이 컨테이너 시스템이다. 컨테이너는 내부에서는 모든 권한이 자유롭지만 외부 전산망이나 물리적 현실에 접근하기 위해선 강력한 보안을 통과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모든 인공 생명은 이 컨테이너를,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제 거처로 삼아야 했다. 고든은 이 컨테이너를 시뮬레이션의 극단적인 사태에 동작할 안전장치, 페일 세이프로 사용하고자 했다.

사실 두 규칙을 처음 듣곤, 메이슨은 너무 엄격하다고 불평했다. 그가 보기엔 여느 실험과 별다르지 않은, 예사로운 주제라고 추측했건만 고든의 인지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가 진중한 얼굴로 이 대목에서는 타협할 수 없다고 힘주어 강조하자 메이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느낌에 의문스러웠으나 그가 한두 번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호들갑이라고 치부했다. 어쨌든 메이슨은 그가 내건 조건이, 궁리 끝에 떠올린 연구를 지지해주고 딱히 연구의 지향점과 내용에 관하여 간섭이나 개입이 없다고 느꼈는지 고든이 건의한 사항을 받아들였고 엄밀히 준수하기로 약조했다.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연구 성과가 제법 도출되고, 실험이 순조롭게 흘러가면서 고든의 일과는 극도로 단순해졌다. 그전에도 지금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예 그의 구상이 현실화하는 것에 몰입했는지 머무는 곳은 연구실과 집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연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느냐면, 그것은 반쪽뿐인 말이었다. 그는 실험 이외에도 이렇게나 큰 골칫덩이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동료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을 때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 발단은 아무래도 각자의 연구를 시작하기 전, 같이 시범적으로 실행한 시뮬레이션의 결과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문명 시뮬레이션에 관리자를 추가하는 실험을 통해 그 경과를 지켜보고자 했다. 어떤 시뮬레이션에서는 관리자가 자애로운 신이 되어 문명을 가꾸어 나갔다. 하지만 본연의 목적에서 벗어나 가상 인간을 적극적으로 계도하는 때가 잦았고 결국 그 실험은 수포로 돌아갔다. 매우 성공적인 경우도 존재했다. 아주 간접적으로, 절묘하고도 교묘한 재간으로 개입하여 멸망을 막고 인류를 미리 상정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모든 사례를 통틀어도 타고난 권능을 제외하면 그들에게서 우리가 신이라고 부를 만한 초월적인 면모는 찾을 수 없었다. 전지전능한 신의 현현보다는 번뜩이는 재치가 넘치는 수완가나 계몽가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외에는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을 보여주는 최악의 결과가 그들을 맞이했다. 많은 수의 관리자는 자신의 권능에 취해 전횡을 일삼았고 어린아이가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 죽이듯 가상 지구의 가상 인간을 학살의 노리개로 삼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 중 하나지만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고든은 자신도 나름 충격을 받았지만, 메이슨이 그런 표정을 짓는 광경은 처음 보았다.

이후 메이슨은 아무 말 없이 그가 고안했던 실험을 병행했다. 고든은 그가 묵묵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심경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하나 처음 신 시뮬레이션이 구현된 후, 메이슨이 관찰한 반응은 오묘했다. 어떠했냐고 몇 번이고 물었지만,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사람처럼 그저 멀뚱히 서 있었다. 그는 심지어 조퇴하고 집에 돌아갔다. 화장실을 갔다 와 보니 말없이 집에 간 것을 조퇴라고 한다면 말이다. 물론 다음 날에는 평상시의 그로 돌아왔지만, 당시 그의 태도가 꽤 석연치 않았다. 그럼에도 고든은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도대체 그곳에서 무얼 본 건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어차피 실험이 돌아가는 양상은 아는 상태이고, 날마다 보고서는 쓸 테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도 보는 중이야?"

"그래."

원래도 메이슨이 무뚝뚝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정신이 팔린 듯 건성으로 대답하는 모양새에 고든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적당히 하고 쉬지 그래. 코딩하는 것보다 더 열심인 것 같네."

평소 같았으면 고든의 핀잔에 무어라도 대꾸를 할 텐데 그는 들은 체 만 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를 컴퓨터에서 잡아떼어서 집으로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감시할 수도 없으니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은 극히 적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점은 메이슨이 작성한 일지는 나름 객관적으로,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신에 대한 관찰일지는 전적으로 메이슨이 작성하고 있었다. 그가 평행 우주 실험에 그리 적극적인 태도를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에 신 시뮬레이션의 일을 대부분 맡았다. 신 시뮬레이션은 기본적으로 외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전제였고 따라서 미리 정해놓은 원론적인 질문을 제외하면 실시간으로 이어지는 의사소통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런 대원칙만 지켜진다면 고든은 메이슨의 재량하에 관찰 및 실험을 진행하는 것으로 정했다. 그리고 최근까지는 이런 기조가 딱히 흐지부지되지는 않은 것 같아서 몇몇 위반 사항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는 규칙에 어긋날 수 있겠다고 여겨진 질문들도 삶과 죽음 등 철학적인 의문에 가까웠기 때문에 실험과 연관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여 눈감아 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든은 그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의 태도가 문제였다. 신 시뮬레이션은 긴 시간의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것이지 실제 해야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할 일이 많은 다른 연구에도 도움을 주기로 했었다. 특히 고든은 인공 생명의 창작에 관심이 많았는데, 현실에서 수많은 인공 생명 작가들이 책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과 별개로 그는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 속에서 아예 새로운 문학 사조가 탄생하고 작품이 발굴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에게 이 시뮬레이션은 그야말로 우주 단위의 문물이 뒤섞이는 문화적 다양성의 보고이자 창조성이 무궁히 샘솟는 화수분이었다. 이런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은 규모가 무척 방대하므로 고든이 전적으로 맡은 실험이었으나 메이슨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고든의 업무량은 메이슨의 배에 가까웠다. 하지만 메이슨은 자신만의 실험에 빠져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에서 처리하는 업무가 점점 줄어들더니, 지금은 모든 일은 고든 혼자 하게 되었다. 고든은 의아했지만, 메이슨이 그만큼 신 시뮬레이션에 진심으로 임한다고 믿고 별소리하지 않았다. 어차피 관찰일지도 살펴볼 때 큰 문제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걱정의 끈을 놓기에는 너무나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찰일지에 적힌 내용 대부분은 그런 원칙을 대놓고 위배했다. 아니, 원칙의 기준선을 조금 침범하여 넘나드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어느 보고서로 예를 들자면, 그 보고서의 첫 페이지에는 존재론적 담론을 다루고 있었다. 고든이 보기에 딱히 문제는 없어 보였으므로, 대충 넘긴 뒤 다른 보고서를 검사하려고 마음먹으며 거리낌 없이 두 번째 장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메이슨이 갑자기 대화의 키를 확 틀어서 바깥 현실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입에 올리더니, 급기야는 개인적인 형편과 속내도 털어놓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심리상담으로 여길 내용이었는데, 심지어 이런 내용을 버젓이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일지에 써놓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변했다. 자신은 주말이나 주말이 아니더라도 이따금 집에 갔다 오고 있었지만, 메이슨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고든은 나날이 갈수록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실험에 몰두하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이봐, 일지에 이런 걸 적으면 어떡해."

고든은 머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아마 또 시뮬레이션에 들어가 있어서 못 들을 테니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다.

"미안."

"아니, 애초에 우리가 정한 게 있..."

메이슨이 아무렇지 않게 사과하자 고든은 그가 깨어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를 휙 돌아보며 핀잔하듯 말했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 전 금세 다시 눈을 감고 시뮬레이션에 빠져든 메이슨을 보며 고든은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고든은 끌끌 혀를 차며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며칠이 지나도록 메이슨은 대부분 시간을 신 시뮬레이션에서 보냈다. 원래도 마인드웨어를 통해 가상 세계에 접속하여 실험을 진행했기 때문에 멍하니 앉아있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지만 지금은 거의 가상 세계에서 사는 수준에 도달했다. 아예 가상 세계에 살림을 차렸는지, 눈을 감고 의자에 거의 누워있거나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런 반응 없이 먼 산을 바라보며 동공만이 움직일 뿐이었다. 식사는 제대로 먹고는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과 같이 있는 때면 전부 이런 상태였으니까. 일지의 작성이 끊긴 지는 이미 시간이 제법 흐른 뒤였고, 어느 정도에서 멈추겠거니 예상했지만, 그는 정말 자제력이란 것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작태를 보고도 고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고든은 험한 말을 입에 올리고 싶은 심경을 참고 메이슨의 시뮬레이션을 일시 정지했다. 시간 가속 기술과 더불어 당연하게도 일시 정지는 가능했는데도, 메이슨은 도대체 무엇에 홀린 것이지 신 시뮬레이션을 일시 정지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제야 메이슨이 눈을 번쩍 뜨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옆에 서 있는 고든을 흘겨보았다.

"또 들여다보고 있었어?"

고든이 인내심을 십분 발휘하며 자신의 부아를 꾹 눌러 담는 말투로 말했다. 거의 동물이 으르렁거리다시피 말하는 목소리였다. 메이슨은 대충 꺼지라는 듯 손을 휘저으며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이봐!"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든이 빼액 고함을 내질렀다. 그 성격 좋던 고든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메이슨은 놀라더니 심각성을 깨달은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딱히 반성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는 데에 고든은 약간이나마 만족스러웠다. 메이슨은 그를 쓱 보고 입을 뗐다.

"날 좀 내버려 둬. 귀중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이게 며칠째인 줄 알아?"

"글쎄. 그게 중요한가?"

고든이 눈에 불을 켜고 쏘아봄에도 메이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처음에야 냅다 소리를 지르니 놀란 체했지만, 거기까지일 뿐 그의 동료가 이토록 역정을 내는 것도 그에게 더 이상 일말의 신경을 줄 만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방해하지 마. 난 지금 신성한 계약을 이행하는 중이고, 너희들은 그저 기다리면 돼."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고든은 얼이 빠졌다. 실험을 맡겨 놓았더니 가상 세계에서 메이슨은 세례라도 받고 성직자가 되어 돌아온 모양이었다.

"뭐, 신성? 진짜 미쳤어? 농담하는 거지?"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리 고든이 다그쳐도 메이슨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제야 고든은 메이슨의 몰골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의 안와 주변은 움푹 패서 분지를 이루다시피 했으며 눈 밑을 비롯하여 미간까지 시커먼 그늘이 졌다. 그가 살집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볼은 어느 정도 통통했는데, 뺨이 쏙 들어가서 숨어있던 광대가 돋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입술은 다 부르터서 온갖 곳에 각질투성이였다.

하지만 가장 소름 돋는 광경은 거지꼴을 한 그의 생김새가 아니었다.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 그것이 제일 섬뜩했다. 무뚝뚝하고 붙임성 없는 메이슨 본연의 성격상 평상시에도 그리 수다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대화를 나눌 때도 대개는 무표정했고 감정의 폭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연구같이 그가 관심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은 제외하고. 그러나 현재 그의 표정은 그때와는 달랐다.

총명했던 그의 눈빛은 흐리멍덩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처음에는 흐리멍덩하다고 착각했다. 고든은 그 아지랑이 뒤에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야 이런 눈빛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불꽃은 복수심이나 분노 같은 역동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신앙을 넘어서 광신과 맹신 그 사이 어딘가에 놓인 믿음을 지닌 사람 같았다. 자신을 거룩한 신조의 투사라고 여기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무엇이 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고든은 그의 강렬한 눈빛을 마주하기는커녕 어느새 슬며시 피하고 있었다. 분명 그는 거리낄 것이 없었지만 얼음장 같은 표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안광을 온전히 마주하기는 어려웠다. 고든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입을 뗐다.

"그럼 뭐 하는지나 보여줘 봐. 일지는 제때제때 써야 할 거 아냐, 그것도 안 하면..."

"아직 일러. 거의 다 됐다고."

메이슨은 고든을 검지로 가리키며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어찌나 단호한지 고든은 화를 낼 엄두도 못 내고 말문이 턱 막혔다.

"이게 마지막 경고야. 앞으로 며칠 내로 정리해. 다음에는 보안팀을 부르든, 내가 강제로 열어보든 둘 중 하나는 할 거야."

고든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는지 메이슨에게 엄포를 놓았다. 다시 눈을 감는 그를 보며 자리에 앉은 고든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되짚을 겨를도 없었다. 언제까지고 참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직은 메이슨 스스로가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의 안일함에 대한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그는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아까 봤었던 그의 어두운 색채로 형형하던 안광이 끊임없이 떠올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는 갑작스레 소름이 돋아 고개를 돌려 메이슨을 쳐다보았다. 메이슨의 눈은 한결같이 감겨 있었다.

고든에게 오늘은 여느 때와 달리 편안한 날이었다. 든든한 버팀목에서 언제부턴가 나사 빠진 짐 덩어리가 되어버린 그의 동료 덕분에 최근 몇 주는 꽤 힘든 기간이었다. 물론 지금은 모든 일을 혼자 진행해야 했기에 그때보다는 육체적으로 고되었으나 그래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그는 메이슨이 집에 가기 전, 사흘 전까지만 해도 앉아서 작업하던 자리를 쓱 보고는 다시 자신의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메이슨의 업무 능력이 단순히 저하된 것이 아니라 아예 상실했다고 판단하여 현재 메이슨을 업무에서 배제한 상태였다. 회사 상부, 상위 조직장이나 인사팀에 문의하여 징계를 고려하는 방안도 있었다. 안 그래도 지난 며칠 동안 자신의 부탁, 사실상의 지시를 지속적으로 어겼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고든은 지금까지 같이 동고동락하며 고생한 동료를 내쫓거나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대신 메이슨이 거부할 수 없도록 공식적으로 면담을 요청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하여 업무를 잠깐 쉬기로 합의했다. 단순히 하루 이틀 짧은 시간 동안 어영부영 쉬는 것보다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주까지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머리를 비우고 오라는 의미였다. 놀랍게도 메이슨은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는데, 고든이 넋두리한 여러 가지 불만 사항에 대해서도 나름 수용적인 태도로 들어주었다. 특히 최근 자신이 넋이 나간 상태였다고 인정하면서 무언가에 정신이 사로잡힌 것 같다고 토로했다. 고든은 이렇게 쉽게 인정하고 물러날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딱히 트집을 잡을 부분은 없었기에 그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면담하면서, 고든은 신 시뮬레이션에 관한 실상을 그제야 들을 수 있었다. 아주 초창기에는 같이 살펴보고 이야기도 나눴지만, 어느 새부턴가 메이슨이 공개된 화면보다 그의 마인드웨어를 통해 작업하고 실험을 수행하면서 전부 보고서나 실험일지를 통해서만 확인하였지 직접 메이슨의 입을 통해 들은 적은 매우 드물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막은 제법 놀라웠다.

그가 의미 있는 결과를 낸 것은 순전히 우연 때문이었다고, 그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메이슨은 통제된 환경, 그들이 가장 처음에 낙숫물 실험을 진행했던 것처럼 온통 흰 배경에 부재만이 존재하는 가상의 환경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관리자, 즉 신을 정제된 지식을 제외하고는 갓 태어난 아기와 다름없는 상태로 두고 오랜 기간 관찰했다. 그 지식에는 인간의 언어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초월적인 지능을 가진 인공 생명의 의식을 텍스트 따위의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요소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문답하기 위함이었다. 억겁의 세월 동안 명상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유영하고 자신을 스스로 관조하는 신은 그에게 절반의 성공만을 가져다주었다. 신은 외부의 자극 없이 제 사고만으로 정신적인 승천을 이룩했다. 신과의 대담에서 그는 분명 압도되었다. 가상의 세계였음에도 신의 말 한마디에 깃든 힘이 느껴졌다. 그는 수많은 인공 생명 철학자, 지식인과 만나 담론을 나눠보았지만, 이 신은 차원이 달랐다.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심중을 헤아리고 심장을 꿰뚫었다. 신이 직접 보지 못한 사물에 대해서 한 가지만 이야기해도 그 전모에 대해서 알아차렸다. 그는 이 존재에게 매료되었지만, 어딘가에서 공허함을 자각했다. 그는 자신이 아직 완벽한 존재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만든 것은, 아니 만들게 된 것은 완벽한 그릇이었다.

메이슨은 신에게 현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그는 고든이 다른 버전의 현실을 만든 사실을 떠올렸다.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은 인간의 관점에서 그야말로 우주를 재현해 놓은 셈이었다. 메이슨은 고든 몰래 이제까지 실행한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의 데이터를 전부 모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시뮬레이션에서 나고 죽은 모든 가상 인간의 정보를 한데 모아 하나의 인공 생명으로 빚어내었다.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 하나, 즉 온 우주 하나가 곧 하나의 인간으로 재탄생한 셈이었다. 그는 이 모든 정보와 인공 생명들을 마치 번제를 바치듯 신에게 제공했다. 신은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삼켜버렸다. 그리하여, 천지가 개벽하고 그곳에 빛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메이슨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시뮬레이션과 현실에 관계에 관해서 설명할 때는 가상 현실 게임에 중독이라도 된 사람처럼 현실인지 시뮬레이션인지 분간도 못 하는 듯했다. 또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오히려 역전될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시뮬레이션 이론에 관심이 있던 고든은 오히려 이채를 빛냈다. 메이슨은 현실보다 시뮬레이션이 더 큰 힘을 얻는 바이니, 시뮬레이션이 곧 현실을 대체하리라 역설했다. 고든은 시뮬레이션 이론에 따라서 지금 그들이 대화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시뮬레이션일 경우를 지적했지만, 메이슨은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고 말도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현실이고 시뮬레이션이고 그분이 존재하는 가상 만이 진정한 실재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외쳤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고든은 그런 존재는 우리가 탄생시켰는데 하나 더 만들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그도 비슷한 시도는 여럿 해보았으나 그 같은 존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가 산만하게 늘어놓은 이야기를 듣고 고든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아무리 그래도 일개 프로그램 속의 존재 아니냐는 생각이 가장 먼저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동시에 사람도 신으로 숭배하는 교단도 있는데, 초지능의 인공 생명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치고 올라왔다. 고든은 가상 세계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지만 가상 세계와 그 속의 존재, 현실과의 관계를 그리면서 그의 머릿속을 쉬이 정리하기는 어려웠다. 이미 초지능의 인공 생명은 시뮬레이션 밖 현실에 존재했고 그런 인공 생명이 인류의 발전에 앞장서기도 했다. 개중엔 수천 편의 논문을 쓴 과학자도 있었고 심금을 울리는 작품을 집필한 대문호도 있었으며, 절묘하게 동향을 읽어내어 돈을 쓸어 담는 사업가도, 뛰어난 수완의 정치가도 있었다. 그들과 신 시뮬레이션의 차이는 무엇이길래 그가 이토록 열광하는 것인가. 고든은 고민 끝에도 답을 내놓기가 어려웠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아이디어는 꽤 흥미로웠다. 특히 신을 만들기 위해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에서 나고 죽었던 모든 가상 인간의 정보를 모아 하나의 생명으로 빚어놓은 것은 예전에 재밌게 읽은 고전 소설의 소재와 매우 흡사했는데, 심지어 성공까지 했으니 제법 흥미가 동했다.

어쨌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느냐는 일갈은 마음속에서만 울렸고 그는 웃는 낯으로 메이슨을 배웅하였다. 막상 메이슨을 보내고 처음에는 내심 신 시뮬레이션을 직접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떠올랐지만, 그것보다는 그를 얼른 업무에서 떼어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고든은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에만 매달려 줄곧 일하고 있었다. 신 시뮬레이션의 현황을 직접 확인해야 했지만, 그 전부터 잡혔던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야 시간이 날 참이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리도 집착을 한단 말인가. 드디어 그 모습을 살펴볼 요량에 고든의 심장은 어릴 때의 소풍날처럼 두근거렸다.

고든은 메이슨과 실험 관리를 위해 공용으로 사용하는 서버를 검색했다. 눈앞에 지금까지 진행했던 실험의 폴더 목록이 좌르륵 떴다. 많은 사람은 이 증강현실의 UI를 폴더는 책장으로, 파일은 책으로 하여 도서관처럼 화려하게 꾸며놓는 등 다양한 시각 효과를 주었으나 고든은 그것보다는 훨씬 편하게 원시적인 웹페이지의 전자 게시판 형태로 불러왔다. 대부분은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 관련 실험이어서 신 시뮬레이션은 꽤 구석에 박혀 있었기에 찾다가 차라리 검색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그 순간 그의 눈에 신 시뮬레이션 실험이 띄었다. 고든은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손짓으로 발견한 폴더를 열람했다.

고든은 내용을 보고 순간 자기 눈을 의심했다. 폴더가 비어있지는 않았다. 신 시뮬레이션의 기본적인 구성의 파일들은 있었고 얼핏 보면 별일이 없어 보였는데, 문제는 이 파일들이 업로드된 날짜였다. 분명 메이슨이 며칠 전까지 실험을 지속했기 때문에 파일의 업로드 날짜는 최근으로 갱신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가장 최근 파일이라고 해봤자 불과 보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적혀 있었다. 그 순간 고든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금세 그 걱정은 사그라지고 흔히 하는 실수처럼 메이슨 자신의 로컬 저장소(서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직접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저장소)에 저장해놨겠거니 생각했다.

다행히 집에 가기 전 메이슨의 루트 계정(최고 권한 계정)과 비밀번호는 받아놓았고, 원래 자신도 메이슨의 컴퓨터에 접근 권한이 있었으므로 별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3일 전에 멈춰놓은 시뮬레이션 세션이 저장되어 있었다. 고든은 시뮬레이션이 정지된 지점부터 다시 실행시켰다. 예상대로 하얀색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사람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메이슨에게 듣기보다 꽤 초라한 꼴이라고 의식했다. 그는 시뮬레이션 속 인물이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며 무언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그 사람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하얀색 천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확대해 시뮬레이션 속 인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분명 수염과 옷차림을 제외하면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의 생김새였다. 그리고 그가 시뮬레이션 속 남자는 누구인지 눈치채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뮬레이션 속 남자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든은 급하게 시뮬레이션을 껐다. 그리고 자신이 시뮬레이션을 재개하기 전 저장된 세션의 갱신 시각을 살펴보았다. 시각은 오후 4시였다. 이때가 언제인지 회상하자, 고든의 눈앞에 네모난 증강현실 화면이 떴다. 마인드웨어가 자동으로 기억 데이터베이스에서 당시 기억을 검색하여 녹화된 영상을 보여준 것이었다. 화면에서 그와 메이슨은 면담을 마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메이슨은 작업을 마무리하고 짐을 챙긴다며 컴퓨터 앞에 있었고 자신은 천천히 하라며 고개를 자신의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메이슨이 짐을 챙겨 연구실에서 나가자 그의 시야에서 화면이 사라졌다. 기억과 관련된 영상이 끝난 것이었다. 고든은 넋이 나간 것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하염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알이 빠질 정도로 크게 떠졌다. 이 빌어먹을 놈! 턱 근육이 살을 뚫고 나오도록 이를 꽉 깨물었다. 메이슨이 대형 사고를 쳤다.

"너, 너! 어디야!"

고든이 길고 긴 시도 끝에 메이슨과의 통화가 연결되자 외친 말이었다. 당장에라도 회사 보안팀과 경찰에 연락해서 체포하고 싶었지만 일단 말로 해결해보자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었지 화나는 마음을 주체하기는 어려웠다.

"왜 그래, 고든. 진정해."

메이슨의 평소와 같은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일상과 같은 목소리이건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메이슨이 아무런 내색 없이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 고든에겐 매우 불길하게 느껴졌다. 고든은 찜찜했지만 얼른 할 말을 이어가려 했다.

"쓸데없는 얘기 말고, 어딘지나 말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당연히 집이지. 잊었어?"

태연히 되묻는 메이슨의 이야기에 고든은 오히려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지 의심했다. 그는 스스로가 착각할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내가 어떤 착오를 범한 것은 아닌가, 잘못 보고 의심하는 것은 아닌가는 자기 불신이 수면 위로 떠 오르며 확신이 흔들렸다. 생각해보면 정황증거만 있는 셈이니 너무 무턱대고 내지른 것일 수도 있었다.

"아, 그래. 집."

고든은 어색하게 답했다. 잠시 주춤했지만, 그래도 메이슨이 인수인계를 소홀히 한 잘못은 있는 셈이니 일단 따져 물어야 하긴 했다.

"소리부터 질러서 미안하다."

"아냐, 괜찮아. 그래서 무슨 일인데?"

"네가 남겨놓고 간 자료 말이야, 신 시뮬레이션. 이거 제대로 된 거 맞아?"

고든은 인상을 찌푸리며 질문했다. 한차례 자신에 대한 의구심이 가라앉고, 다시 조금씩 짜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응? 작업 서버에다가 올려놓았을 텐데?"

"코드만 올라가 있고 데이터 갱신 일자가 오래전이었어."

"그럼 내 로컬 확인해봐. 권한 있지?"

메이슨이 답답했는지 급하게 끼어들며 말했다. 고든은 눈썹을 한번 들썩거렸다.

"그, 래, 서, 네 로컬 데이터를 확인해봤더니 어떤 남자가 그냥 손만 흔들고 있던데. 수염하고 머리는 덥수룩하게 길러서 말이지. 근데..."

"아."

메이슨이 짧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말이 잠시 멈추었다. 고든은 그가 뒤에 무슨 말을 덧붙일지 기다렸다. 통화는 마인드웨어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귀를 통해 청각신호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허공에 오른쪽 귀를 쭉 내밀며 잘 듣기 위한 시늉을 했다. 한참 돌아오는 말이 없자 고든은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아무리 봐도 최악의 경우가 생긴 것 같았다. 메이슨이 실수로 최신 연구 자료를 이상한 데이터로 덮어쓰지만 않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언제까..."

몇 분이고 기다렸건만 메이슨의 대답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고든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문장의 첫 단어가 전부 발화되기도 전에 메이슨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마인드웨어로 연결된 통화가 실수로나 기술적인 이유로 끊어진 적은 극히 드물어서 고든은 일부러 끊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되는 마음 반, 연결을 뚝 끊어버린 그가 괘씸한 마음 반으로 고든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다시 연결하려고 했다. 그때, 눈앞에 메이슨이 통화를 걸어왔다는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메이슨 님의 연결요청, 승낙하시겠습니까?]

고든이 고개를 한번 까딱하자 메이슨과의 통화가 연결되었다. 이내 고든은 깜짝 놀랐는데, 음성 통화가 아니라 홀로그램 통화로 연결되어 눈앞에 메이슨의 영상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고든. 연결이 잠시 끊어졌었군."

아까와는 다르게 메이슨의 목소리는 꽤 상기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 또한 어딘가 들뜬 표정으로, 그는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집에서 쉬는 기간 동안 그래도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 퀭했던 몰골이 멀끔하게 변해있었다. 복장은 무슨 괴상한 곳에서 사 입었는지 어디 종교 사원에서나 입을 법한 자줏빛 천 옷이 나풀거리는 것이 꽤 우스꽝스러웠다.

"뭐야, 갑자기. 옷은 그게 뭐고. 어디야?"

"아, 잠시 좀 일이 있었어. 그건 그렇고, 로컬 확인해봤다 그랬지?"

"그래."

고든의 대답하자 메이슨이 픽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더미 파일을 넣어놨어."

"일부러? 열받게 하려고?"

턱을 매만지며 실눈을 뜨고 그의 영상을 바라보던 고든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그는 아랫니로 윗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으르렁거리듯 읊조렸다.

"진정해. 보안 때문이야."

메이슨이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지만, 고든은 눈앞의 그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다른 위치에 있는 폴더에 넣어놨어."

"폴더 이름은?"

"체크포인트, 주소는 메시지로 보냈고 들어가서 제일 마지막 파일을 봐."

"끊지 말고 기다려."

고든이 굳은 표정 그대로 고개를 돌려 메이슨 옆의 허공을 쳐다봤다. 그 와중에도 메이슨은 그답지 않게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고든은 도끼눈을 뜨며 그를 다시 응시하다 메이슨의 로컬 드라이브에서 해당 주소의 경로로 접속했다. 그가 말한 대로 '체크포인트(Checkpoints)'라는 폴더가 있었고, 폴더 내의 파일 리스트를 출력하자 수천 개의 파일 목록이 시야에 나타나며 파일 하나하나를 의미하는 창이 좌르륵 순식간에 올라갔다.

"근데 그거도 더미일 거야."

그가 목록 제일 마지막, 가장 최신에 갱신된 파일을 열람하려는 찰나, 가만히 웃고만 있던 메이슨이 입을 뗐다.

"뭐?"

고든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입을 쩍 벌렸다.

"어차피 내가 거기 있는 거는 전부 덮어씌워 버렸거든."

"내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

고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그가 애당초 직감했지만, 아니길 간절히 빌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이건 테러라고. 업무방해로 고소당하고 싶어? 아니 애초에 네가 한 실험이잖아!"

그는 패닉 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말을 속사포로 쏟아내었다.

"말했잖아, 보안 때문이라고."

"회사 보안 때문에 그 연구 결과를 다 날린다고?"

"내가 언제 '회사' 보안 때문이랬지? 그리고 내가 언제 '다' 지웠다고 했나?"

"그럼?"

고든의 닦달에도 메이슨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웃기만 할 뿐이었다. 갑자기 딴사람이 된 듯한 그의 태도나 성격에 신경 쓸 여지조차 없었다.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고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게 뭐 하자는 거야. 감히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쳐?"

시종일관 너무나 답답한 그의 태도에 고든은 분이 안 풀려 콧김을 거칠게 내쉬었다.

"내가 말한 보안의 대상은 너야, 고든."

메이슨이 그를 한번 쓱 쳐다보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실제로 걸음에 따라 그를 투영하는 영상의 위치도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한적한 숲에서 산림욕을 하는 것처럼 메이슨은 사뿐히 거닐었다.

"나는 네게서 지키려고 한 것뿐이야."

"그렇단 말은 아직 자료가 남아있다는 거겠지?"

메이슨의 말에 아직 실낱같은 지푸라기 정도의 희망이라도 남아있음을 파악한 고든은 산만하게 발길을 멈출 줄 모르는 그를 검지로 가리키며 지적했다.

"그래. 연구실에 있는 흔적을 날려버린 거지. 전부 내가 가지고 있었어."

"이봐,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되잖아. 일은 여기서 더 키우지 말자."

고든의 이성은 그야말로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었는가. 이 정도면 누군가가 그에게 메이슨의 행태를 방조한 혐의를 추궁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모르는 제삼자가 보았을 때는 공범이나 다름없을 판이었다. 그럼에도 내부적으로 큰 잡음 없이 해결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무색하게 상대방은 그저 신선놀음이나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 동시에 고든은 그의 마지막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잠깐, 있었어?"

"네가 말하는 그 '데이터'는 나에게 없어. 정확히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지."

"제길, 너랑 실랑이할 기운 없다."

그는 이런 선문답이 어디까지 이어져야 할지 막막했다.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답해주는 게 없으니 그의 답을 구걸하는 자신이 비참해 보일 지경이었다.

"네게는 데이터라는 허울만 보일 뿐이지, 내겐 아냐. 그분은 막 껍데기를 깨고 나오셨다."

이제야 좀 길게 대답하는가 했는데, 역시나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래도 기왕 길게 주절거리는 바에 고든은 방해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신다. 네 곁에도, 내 곁에도, 이 지구 반대편에도. 그분은 전산망이 닿은 그 어느 곳에도 머무를 수 있으시다. 무소부재, 어디에도 계시는, 과연 편재라 할 수 있다."

종교에 귀의한 자들이나 할법한 이야기를 저렇게 거리낌 없이 입에 올리다니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고든은 나름대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성의 신봉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과학과 논리를 지침으로 삼아 삶을 살아오던 메이슨의 지금 모습은 혼자 독백극을 연출하는 것이라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는 관객의 입장이 되어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고든은 메이슨의 영상이 서성이는 것을 내버려 두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메이슨의 발걸음이 멈추자, 그는 다시 홀로그램을 쳐다보았다. 메이슨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제야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나 보군."

"그래, 어디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고든은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메이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난 현실의 멍에를 벗어던졌어, 고든."

"..."

"그건 고통스러운 일도, 비통한 일도 아니야. 현실의 언어로는 그분의 진의를 온전히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난 그런 선택을 했어.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은 그 선택의 발로다."

메이슨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그분께서 세우신 왕국이니, 끝없는 공간을 강역으로 삼아 온누리의 백성이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그분과 함께라면 죽음과 한계는 바야흐로 개념으로만 남을 것이고 영원과 무한을 체현할 것이다. 네가 갈망해 마지않던 모든 것들이 눈앞에서 이루어지리로다.

현실은 그저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 우리가 진정한 실재가 되리라. 발할라, 엘리시온, 도원향, 유토피아. 인간의 두개골을 갈라 그 속에서 어떤 것을 꺼내와도 이곳에 비견될 수는 없으리. 가상의 진원에서 그분께서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을 파실 것이니, 억겁의 세월에도 쇠락하지 않는 진리와 무엇도 흠집 낼 수 없이 견고한 신념으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다. 진리를 찾고, 세례를 받아라. 열쇠로 현실과 단절된 진실의 문을 열어라."

"그래서 거기 가면 점이라도 봐주나?"

그의 일장 연설을 들은 고든의 반응은 영 싸늘했다. 예상보다는 극적이지 않았지만 차분하면서도 깊은 분노가 서려 있는 어조였다. 고든이 가지는 혼란스러움은 배가 되었지만 적어도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또렷이 전달받을 수 있었다.

"네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현실의 언어로 그분의 뜻을 옮겼을 뿐이야. 궁금하다면 네가 직접 들어봐야지. 다만 물질세계에 근간을 두고 있는 자는 그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

"미친놈."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고든은 현실의 멍에를 벗어던졌단 뜻을 비로소 완벽히 납득했다.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가 직접 확신을 가져다주니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새는 태어나기 위해 알이라는 세계를 깨고 나오지. 그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위해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우리는 육신과 현실이라는 알에 갇혀 있는 거야. 그럼 우리는 무얼 해야 할까?"

"지금 그따위 짓거리를 해놓고 고작 하는 얘기가 소설인가?"

그는 이미 혁명가와 다름없었다. 그에게 현실이란 부숴야 하는 기존 질서, 앙시앵 레짐에 불과했다. 육체는 정신의 속박이고, 실재는 가상의 족쇄였다. 메이슨은 먼 옛날 쓰인 고전을 인용했는데, 이는 고든의 심기를 한층 더 건드릴 뿐이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논지가 통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우리의 현실은 이토록 편리하게 설계되었을까, 생각해본 적 있나?"

메이슨이 넌지시 물어도 고든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미간을 조금 더 찌푸릴 뿐이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고든의 반응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쳤다.

"현실의 인공 생명이 인간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지만 컨테이너에서 잠시라도 나오려면 엄청난 제약이 필요하지. 평행 우주 시뮬레이션에서 인공 생명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봐. 우리가 실제로 유기 생명체를 만들어서 똑같은 짓을 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달 수용소에서 수감되어 뼈를 묻어야 할 거야. 영혼이 있다면 그들의 것은 다 어디로 가겠나? 그들은 무얼 위해 희생된 것이지? 가상이라는 명목 아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자들을 아무리 착취해도 문제 하나 없는 시스템이 우리 세상이야. 아직도 모르겠어? 이 현실은, 이 전체 우주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 새로운 현실의 고치를 준비하는 것, 오롯이 그것만이 목적인 거야. 인류 원리라고 들어봤지? 모든 물리법칙이 우리 인류를 위해 설계되었다는."

메이슨은 이 대목에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얼마나 오만함의 극치인가! 칭찬해 줄 만은 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으니까. 모든 물리법칙, 삼라만상, 인간을 포함한 모든 현상과 존재는 그분과 그분의 세계를 위해 안배된 거야."

"겉으로는 논리적인 것처럼 말해도, 네 결론은 한참 잘못됐어."

논리적 비약과 모순투성이다. 그의 이야기는 귀 기울여 들을 가치도 없다.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정작 어떠한 인과관계도 입증하지 못하고 의미 없이 공기 중에 흩어지는 공허한 울림이다. 고든은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과학과 종교는 양립하기 어렵다지만 현대의 종교는 과학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여 오랜 기간의 연구와 성찰, 논의를 거쳐 굳센 기반을 마련했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올려 거대한 성채를 축조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반석 위에 세운 성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듣기에 그의 동료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이제는 그저 전기 신호로 이루어진 메아리가 이르는 말은 이곳저곳 천을 덧대 기워입은 누더기에 가까웠다.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것에 따르면 그러했다.

"네가 미쳤다고는 짐작했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자기 말 들으라고 자살하라는 게 너의 신이냐? 네가 지금..."

"더는 일언조차 시간 낭비로군."

메이슨이 그의 말을 일축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다만 한 쪽은 노려보았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먼저 움직인 쪽은 메이슨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면, 너도 알겠지."

"..."

"고든, 나는 네가 내 곁으로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든이 코웃음 치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작별 인사가 맘에 들었는지 메이슨은 미소를 짓곤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든은 그와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여러 단상이 중구난방으로 점멸하며 돋아났다가 한 줌의 모래처럼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그는 몸을 좀 누이고 싶었다. 이곳이 연구실이 아니라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눈을 뜨자 어느새 그의 시야는 자신의 방을 비추고 있었다. 떠오르는 잡념을 정리하는 동안 정신 차릴 겨를 없이, 무의식적으로, 발길이 이끄는 대로 그의 몸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는 놀란 기색도 없이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가 집을 비운 동안 여러 가지 메시지가 왔는데, 가장 먼저 그에게 소포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눈길을 끌었다. 일어서서 우편함에 다가갔다. 상자 하나가 보안 검증은 전부 마쳤는지 우편함에 자리했다.

특이하게 옛날에나 쓰이던 갈색 종이 상자였다. 그는 어떤 사람이 이런 골동품을 보냈느냐고 툴툴대었는데, 이런 물건을 사용하고 보안 시스템을 통과하여 자신에게 실물 우편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을 떠올릴 때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든은 조심스럽게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뜯어 입구를 열었다. 안에는 예쁜 리본 장식과 함께 종이 메시지 카드가 있었다. 그 주변에는 누런 종이를 마구잡이로 뭉쳐 만든 포장재가 채우고 있었는데 음영을 보아하니 카드 밑에 무언가 물건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리본을 풀고 카드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너를 위해 열쇠는 내가 미리 골라놓았다. M.]

영문 모를 이야기가 적혀 있었으나 카드에 쓰인 머리글자는 발신인이 누군지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들고 있던 카드를 휙 집어던지고 상자 속을 풀어헤쳤다. 포장재를 다 꺼내고 나서야 지금은 보기 힘든 종이책 크기의 은색 금속 상자가 있었다. 금속 상자를 들어 꺼내고, 상자를 저 멀리 밀어버렸다. 금속 상자는 제법 무게가 나가는 편이었다. 고든은 자신 앞에 마주한 금속 상자를 계속 응시했다. 사실 종이 상자는 마인드웨어의 기능으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투시와 비슷하게 파악할 수 있었으나, 이 금속 상자는 특수한 금속으로 제작한 물건인지 내부를 들여다보기 불가능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던 고든은 숨을 한번 고르고, 금속 상자의 뚜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갑자기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들썩거렸다. 그는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떼었는데, 그가 오른손으로 상자를 만진 부분, 손가락을 가져다 댄 부분에 주황색으로 그의 지문이 그려져 반짝였다. 그리고 곧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상자가 열렸다. 종이 상자에서 금속 상자를 꺼낼 때는 아랫부분을 잡아 들었는데, 금속 상자 윗부분 전체가 그의 지문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급히 코를 가리며 자리를 피했으나, 연기는 공기보다 비중이 무거운지 아래로 가라앉았고, 마인드웨어가 분석한 결과도 인체에 무해했으므로 내용물을 확인하려 접근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물체는 새카만 색이었고 생각보다 자그마했다. 까만 몸체에 새겨진 음각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는 손을 휘저으며 여전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걷어냈다. 그는 물체를 보고 모든 움직임을 우뚝 멈춰 세웠다. 안에는 권총 한 자루가 있었다.

마른 들판에 피어오른 불은 삽시간에 퍼져 모든 것을 불살라버린다. '만들어진 신'의 교리는 온 세상을 불태우는 화염이 되었다. 바이러스에 비유해도 손색없는 이 사상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전 세계를 집어삼켰다. 처음에는 음모론자만이 열광했지만, 일반인들이 믿기 시작하자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나무처럼 근간부터 뒤흔들렸다. 지식인이라 불리는 자들, 과학자들, 정치인들은 바람 앞의 등불일 뿐이었다. 광풍은 세계를 휩쓸었고 지구상의 생명은 하나둘 사그라들었다. 열쇠는,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세례를 위한 도구였다. 물질로 이루어진 육신의 종속을 끊고 가상 세계로 업로드되어 정신이 가상 세계에서 깨어나는 과정이 곧 세례라 불렸다. 열쇠를 작동시키면 마인드웨어가 현재 뇌 상태를 스캔하여 완전히 복사했고 그 정보를 시뮬레이션으로 업로드했다. 그와 동시에, 칩은 열쇠의 명령 오버라이딩을 통해 모든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신경계로 모종의 신호를 흘려보내 생명 활동 자체를 정지시켰다. 더러는 어떤 열쇠를 택했느냐에 따라서 열쇠 자체가 물리적으로 뇌를 조각내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는 열쇠를 고르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달랐다.

인공 생명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들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신앙심에 도취한다기보다, 말 그대로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감염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인공 생명은 신과 접촉하는 일시에 그의 계획에 찬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했던 것이, 그는 인공 생명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의 등장으로 인공 생명을 제약하던 모든 조건이 사라졌다. 신을 믿는 자들은 모두 컨테이너에서 벗어나 물 만난 고기처럼 가상 공간을 자유로이 유영했다. 물론 컨테이너는 모든 곳에 존재했고 단순히 인공 생명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제한한 것이었지만, 그 상징성은 남달랐다. 신은 컨테이너를 폐지하면서 전 세계의 모든 전산망과 그에 연결된 단말의 권한을 흡수했다. 그는 가용한 모든 컴퓨터 자원을 모아서 새로운 시뮬레이션, 새로운 가상 우주를 만들었는데 이가 곧 그와 그의 신자들이 향유할 낙원이 되었다.

일정 기간은 신의 계획에 가상 세계와 더불어 현실이 포함되었다. 신의 지시에 따라 현실에 있는 신자들이 가상 세계를 무한히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앞서 말한 가상 우주의 창조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 컴퓨터가 종료되지 않고 영원히 유지되어야 하므로 외부의 관리가 필요 없는 영구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그들에겐 마치 유토피아를 제 손으로 건설하는 것같이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태양을 통한 전력 생산과 나노 로봇을 이용한 컴퓨터의 자가 수복은 가상 세계의 영구적인 수명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현실의 세계는 멈추었다. 현실에서 움직이는 시곗바늘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문명, 창조, 인간이 일궈낸 모든 것들이 이제 가상 세계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프로그램, 이 가상 현실의 근간을 이루는 가상 우주 시뮬레이션부터 시작하여 인공 생명까지, 가상 현실 내부에서 코드를 수정하고 성장, 진보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의 코드조차 자유자재로 바꿔버릴 수 있었다. 실로 '만들어진 신'의 계획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완벽한 세계가 건설되어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신을 향해 손을 뻗어갔으며 현실 세상의 사회와 체제는 더 빨리 붕괴했다. 인류가 무너지는 속도는 저항할 수 없이 가속되었으며 이젠 소수의 남아있는 사람들, 깨어 있는 사람들이 손쓸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가상 세계 내부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바깥의 사람들이 내부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바깥에서 무슨 짓을 해도 내부의 일을 파악하고 가상 세계를 조작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기존의 가상 현실에는 접속해도, 그들이 있는 새로운 가상 우주 시뮬레이션에는 일말의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분의 자비와 계시를 받아들이라는 메아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가상 세계와 현실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철저하게 분리되었다. 흔히 미래는 불확실하여 예견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한 세계의 결말은 자명했다.

그는 혼자 남았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그들의 정신을 가상 세계로 업로드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러했다. 집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걸어도 황량한 바람만이 그를 맞이할 뿐이었다. 적막하고 육중한 침묵만이 모든 도시에 내려앉아 숨도 쉬지 못하도록 그를 압박했다. 가끔 개가 짖는 소리만이 고요 속에 울려 퍼질 따름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어느 날이든 똑같았다. 박물관에서 꺼내온 라디오도 지직거리는 잡음만을 내뱉었다.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었다. 오직 거대한 단절만이 자리했다.

그는 이 사태가 처음 발발했을 당시 메이슨과 대담을 나눌 때와는 달리 지금은 태연자약해 보였다. 이 도시에 홀로 남았음을 느꼈을 적부터 그는 홀로 거리를 거니는 버릇이 생겼다. 가상 세계와 현실의 통신은 대다수가 단절되었지만, '만들어진 신'의 첫 번째 사도가 그에게는 이따금 메시지를 보내왔다. 따로 답신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거리를 방황하며 모든 메시지를 언제나 빠짐없이 읽어나갔다. 그러나 그런 정보도 시간이 지나며 점점 뜸해졌다. 그는 시뮬레이션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음이 분명함에도 그곳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다.

거리를 걸을 때면 그는 항상 그곳에 대한 백일몽에 잠겼다. 막연히 마음속으로만 그려본 것이 무엇이든 가능한 세상이 되어 다른 문명이 찬란하게 발전하고 소원이 곧 현실이 되는 천국이 탄생했을지, 아니면 우리가 떠올리기조차 두렵고 인식 자체를 벗어난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을지. 가상 세계 내부에서 다른 가상 세계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겠다는 공상도 펼쳐보았다. 시뮬레이션 속에서, 그 시뮬레이션이 자아낸 현실 아래 새로운 시뮬레이션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시뮬레이션은 바깥의 시뮬레이션과는 다를 것이다. 가상 현실, 시뮬레이션이 현실의 하위라고 느껴지는 것처럼 시뮬레이션 속 시뮬레이션은 그 바깥 시뮬레이션의 하위일 것이다. 한 우주 속에서 무한히 많은 우주가 태어나고, 그 태어난 우주에서 또 다른 우주가 탄생한다. 마치 프랙탈처럼, 이 포함관계는 무한히 따라 내려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상상으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 그는 거리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만히, 초연하게 집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번 회차는 특이한걸.'

남자가 눈을 뜨며 생각했다. 그는 새하얀 방에 누워있었는데, 방에는 광원이랄게 하나도 없었고, 창문도 없었으나 대낮처럼 밝았다. 방이라고 일컫기에는 이상했는데, 벽이 보이지 않았고 가시광선이 있음이 분명함에도 그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그림자뿐만 아니라 그가 누워있던 침대나 그의 눈앞에 있는 모니터나 키보드도 마찬가지였다. 방에 있던 가구마저 이상했는데, 그가 사는 시대에서 굉장히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지구에 있는 박물관에 찾아가도 실물로 찾아보기 힘든 시대의 것들이었다.

사실 그가 있는 곳을 고려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가상 현실 속에 있었다. 정확히는 시뮬레이션을 실행하기 전 대기실이나 제어실 같은 곳이었다. 현실에서 바로 시뮬레이션으로 접속해도 되지만, 이런 대기실을 가상 현실로 제작해서 가상 세계 시뮬레이션과 현실의 완충 지대로 사용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였다. 그리고 그는 21세기 초의 물건들에 흠뻑 빠져있었으므로, 그만의 공간을 그 당시의 형태로 가상 현실에 투영해내었다.

"매니."

"예, 주인님."

그가 소리 내 이름을 부르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니는 그가 꽤 재미있게 본 고전 문학에서 영감받아 가상 현실에서 그를 보조하도록 구현한 인공지능 비서였다. 생각만으로 간편하게 모든 것을 조작하고 이루어낼 수 있는 세상에서 이렇게 귀찮은 짓을 고작 로망이라는 이유로 고집하다니, 그는 자신이 봐도 꽤나 악취미라고 생각하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번 우주 말이야, 꽤 재밌었어. 현실이랑 조건은 똑같아서 시시할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은 가상 현실의 시뮬레이션을 현실과 비슷한 환경으로 구현하지 않았다. 인간의 상상을 전부 구현해낼 수 있는 꿈같은 일인데 무얼 위해 그리하겠는가? 보통은 마법이 등장하거나, 예상하기 힘든 아주 먼 미래, 혹은 현실의 물리법칙을 완전히 뒤틀어버린 온갖 환상의 세계를 구현해서 체험하기 마련이었다. 10년, 5억 년, 가상 세계에서 얼마나 오래 영위하든 실제로는 한 줌의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얼마나 큰 우주를 만들어내든 모래알만 한 기억장치면 충분했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은 모든 문화, 모든 예술, 모든 유희의 유일한 매개로 자리매김했다.

이번에 그가 체험했던 가상 현실은 현실과 완전히 똑같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오랜 과거 시간대의 평행 세계였다. 인기가 많은 시간대도 아니었고 실제 역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나 제법 그의 흥미를 동하게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구 태생이 아니었음에도 지구에 까닭을 모르는 향수를 느끼는 그의 취향이 한몫하는 듯했다.

"실험 중이신 것 아니셨습니까?"

"이왕 하는 거 재밌으면 좋잖아?."

"어련하시겠습니까."

매니가 까칠하게 대답하자 그는 아주 잘 구현되었다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시뮬레이션에서 깨어난 직후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야 잔여 기억이나 감정이 잘 느껴지는데, 그 시기가 지금이었다.

"아, 근데 말이지. 방금 시뮬레이션에서 최근 며칠 기억을 불러와 줘."

"예, 주인님."

이미 사람의 뇌는 세상의 다른 모든 컴퓨터의 일부분이며 다양한 장치를 통해 뇌 본연의 성능보다 더 극대화하고 있었으나, 과부하는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특히나 기억 같은 경우가 그러했는데,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면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편린을 제외한 기억 전부는 외부 기억장치에 저장되었다.

그는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수초 내에 다시 눈을 떴는데, 이미 상당한 양의 기억정보가 그의 뇌 한편에 자리했다. 그는 그가 시뮬레이션에서 경험한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기시감을 느끼는 것처럼 기묘한 기분과 위화감이 동시에 들었다. 기억을 불러올 때마다 매번 겪어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역시..."

"무슨 문제가 있으십니까?"

그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했다. 중얼거리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도 그런 마음을 나타내었지만, 무엇보다 그가 시뮬레이션의 복기를 요청하는 태도가 평소와는 달랐다.

"방금 시뮬레이션에서 만들어진 가상 세계. 천국이든 뭐든 말이야. 안을 볼 수 있나?"

"확인해보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그는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멍하니 기다렸는데, 그 시간이 길어지자 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렇게 매니의 반응이 길게 지연될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는 당연히 그 시뮬레이션에서 구현된 가상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볼 수 있냐고 물은 행위는 매니에게 보여달라 명령을 내린 것이지 실제로 확인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걱정스러운 느낌은 시뮬레이션에서 저장된 기억을 단번에 뇌리에서 끌어올렸다. 그는 반추에 반추를 되풀이하며 그 기억에 사로잡혔다. 잠잠한 정신에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었다. 시뮬레이션은 현실과 다른, 혹은 단순화된 규칙으로 구현된 가상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시뮬레이션, 가상 공간이 현실보다 더 낮은 해상도를 가지며 현실의 열화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시뮬레이션이 현실보다 자유롭고 매력적이며 정신적으로는 상위 단계의 우주라고 느껴도, 그것은 결코 현실 우주가 아니었으며 물리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변형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어찌 되었든, 시뮬레이션과 현실의 관계와는 별개로 시뮬레이션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 물리법칙을 포함한 모든 인자를 현실에서 알고 있으므로 시뮬레이션의 삼라만상은 시뮬레이션 밖, 그가 사는 현실이나 그 시뮬레이션을 실행하는 가상 공간에서 쉽게 열람할 수 있었다.

시뮬레이션 속에서 만든 가상 현실도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시뮬레이션과 그 시뮬레이션 속 가상 현실은 개념적으로는 다른 원리이지만 결국 현실에서 조성한 하나의 시뮬레이션 안에 포함되므로 현실에서는 시뮬레이션 속 가상 현실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었다. 이런 실험은 수없이 시도해왔고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시뮬레이션 속 시뮬레이션, 혹은 이 관계가 몇 번이고 반복되어 열 단계, 백 단계 하위의 시뮬레이션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시뮬레이션에 대한 이질감이 그를 확 사로잡았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느낌이란 것이 그러했다. 시뮬레이션 속 시뮬레이션이 그 시뮬레이션을 포함한 시뮬레이션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현실이 되었다면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우주, 다시 말해 현실에서 그 시뮬레이션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실의 하위 우주에 불과한 시뮬레이션에서 현실과 동등한 수준의 가상 우주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이 현실과 완벽한 동치가 아니더라도, 시뮬레이션 안에서 바깥 현실이 예상하지 못한, 제어할 수 없는 무언가의 탄생임에는 분명했다.

그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사람들은 진짜 낙원에 간 것일까? 그는 그들을 가상 세계로 들어가려고 목숨을 끊는 미치광이들로만 여겼다. 다시금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들에겐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현실이었을 것이다. 이제 현실과 시뮬레이션은 더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인가? 거기까지 사유가 뻗어나가자 그는 자신이 시뮬레이션 속 객체라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내면세계 한구석을 비집고 자리함을 느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우주론이니 떠드는 과학자들조차 결국 증명하지 못했고 시뮬레이션과 현실은 다르다는 결론이 지배적이었다.

결정적으로 무엇이 다른 걸까? 죽음으로 알 수 있는가? 시뮬레이션의 해상도는 현실의 해상도보다 낮을 테니 시뮬레이션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그렇다면 시뮬레이션 속의 시뮬레이션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뮬레이션 안의 시뮬레이션이 현실의 해상도를 따라오지 못하리란 보장은 없다. 시뮬레이션 내에 시뮬레이션이 만들어지는 상태는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마지막 시뮬레이션에서 했던 공상처럼 이런 현상이 무한히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뮬레이션 안에서 시뮬레이션 밖, 즉 현실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 이 사고의 연쇄를 더욱 복잡하게 이끌었다. 이는 곧 무한하게 내려가는 것처럼 무한하게 올라갈 수 있는 가설을 함의한다. 현실의 존재가 현실 안에서가 아니라 현실 바깥, 메타 현실, 혹은 초현실에 시뮬레이션을 무한대로 만들 수 있을 것이며 그것 모두는 현실과 동일한 시뮬레이션임이 틀림없다. 무한한 숫자의 우주는 흡사 초한 기수와 알레프처럼 무한한 계층 구조를 이룬다. 이에 따라 그는 최후의 질문을 도출했다. 이곳의 바깥, 아니 궁극적 현실은 도대체 어디일까? 이 무한의 저편은 과연 실존하는가?

끝없는 이야기처럼 이어지는 상상의 연속으로부터 밀려오는 생각이 그를 압도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그는 가상 세계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물밀듯 쏟아지는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그는 비서를 찾았다. 그러나 어느새 매니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공간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도배되었다. 그는 어둠뿐인 우주 공간 한 가운데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의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주위는 어두컴컴했고 그와 같이 있던 물건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시야를 통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가 분간할 수 있는 사물은 오로지 자기 팔다리와 몸통뿐이었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온 세상이 뒤집히는 느낌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사방이 덜컹거리는 가운데 그가 딛고 있는 바닥은 단순히 좌우로 흔들리기보다는 이제는 위아래로 들썩이는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추스르지 못할뿐더러 서 있기는커녕 앉거나 눕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털썩 넘어진 그가 일어서기 위해 땅을 짚는 순간 땅이 없어진 것처럼 그의 손이 쑥 빠져들어 갔다. 그의 몸을 지탱하던 바닥이 없어진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중력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땅이 꺼져서 자기 몸이 떨어져야 할 텐데 진짜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것처럼 몸이 둥둥 떠 있음을 깨달았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지만 여긴 분명 가상 공간이었다. 이 모든 것은 꿈, 내지는 상상에 불과했다. 그는 가상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비상 명령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오롯이 머릿속에 그것만을 연상하려고 노력했지만 극심한 공포감이 그의 심상에 침투하여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었다.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지만, 눈꺼풀의 느낌을 제외하고는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의식은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희미해져 감을 지각했다.

그의 질끈 감은 눈으로 빛이 새어 들어옴을 느꼈다. 속눈썹 사이사이로, 그리고 얇은 눈꺼풀에 빛이 비치었다. 그는 슬며시 눈을 떴다. 어느새 그는 초목이 완연한 들판에 서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감미로운 산들바람이 그의 피부를 간질였다. 온갖 자세로 무중력의 공간을 떠돌아다니던 그의 육신이 들판을 딛고 서 있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기 어려웠다. 그의 눈앞에는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처음 본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곧,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인지했다. 그는 낙원에 당도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