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bis Tertius
최종적 서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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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 Note; Excerpt 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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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문이다. 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그 문을 유난히 많이 드나들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빈도가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많이 꾸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기억에 사무치는 일부터 시작해서, 과거에 대한 짙은 회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기쁜 일, 슬픈 일을 가리지 않고 꿈에서 많은 것을 목격했다. 그래, 목격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내가 직접 겪는 것 같은 꿈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벌어지는 일에 휘말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꿈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꼭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이든 감소하는 방향이든 양쪽 확률의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일들이 뒤엉켜 혼돈을 이룬다. 개연성이 붕괴하여 인과 관계가 역전되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 순수한 공상만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그것이 꿈인 것 같다.

꿈에 대한 단상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내 상상의 한계가 꿈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 있더라도, 나는 언젠가 내 심상을 온전히 투영할 글을 쓰길 바랐다. 비록 단 한 작품도 세상에 내놓지는 못했지만, 장대한 허구의 세계를 자아낼 능력 자체는 충분했다고, 스스로를 그리 여겼다. 꿈이라는 미지에 대해서 분명 깊은 이끌림이 있는 것은 맞다. 하나 더 흥미로운 세계는 충분히 많다는 것을 난 진즉에 깨달았다. 특히 우주 밖이나 완전한 공상 속의 세계, 가상 현실 등이 더 내 관심을 이끌었다. 뉴런의 연결망과 전기 신호, 화학 작용으로 인한 정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조합도 무수히 많다. 그 한계는 실로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감각 기관이라는 창문만을 내놓고 두개골이라는 감옥 안에 갇힌 질척질척한 유기물, 세포 덩어리는 유한한 반면 그 감옥 밖에 펼쳐진 우주는 무한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것이 뇌와 세계, 꿈과 우주라는 것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회사에서 시끌벅적하게 동료들과 일을 하고 퇴근하는 길이면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갈 때, 나의 귀가를 알아차리는 것은 축 처진 몸을 발견해 반겨주는 등불 하나뿐이다. 그 빛을 하염없이 보고 있노라면, 나방이 불 주위에서 맴도는 그 모습이 어리석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도 있지만 삶이 항상 비참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옛이야기를 다시 꺼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사람이 겪는 일 중 몇 가지는 폭풍과도 같다. 휘몰아칠 때 풀 한 포기 남겨 놓지 않고 송두리째 뽑아버리는가 하면,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몇 가지를 남겨 놓고 가기도 한다. 물질적인 손해로만 봤을 때는 후자였다고 생각하지만 정신적인 영향까지도 고려한다면 지금의 나에게 불어닥친 폭풍의 피해는 전자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재해 이전과 이후의 인생이 같을 리가 없음에도 만무하고 이후의 삶은 내 허락도 없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내 정신은 아직 이전의 삶에 남겨졌지만, 새로운 인생에서 방랑하는 것도 곧 익숙해졌다. 아니, 익숙해진 것인지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말은 그날도 평소 보내는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날도 꿈을 꾸었다. 누구나 그렇듯, 오늘은 반드시 꿈을 꾸리라고 예상하지는 않았다. 누가 잠자리에 들며 오늘은 꿈을 꿀 것만 같다고 예언하겠는가? 다만 잠이 들기까지는 평소보다 조금 더 뒤척였다. 잡념이 꼬리를 물고 찾아와 베갯머리에서 속삭였다. 근심이 기습하여 불면이라는 단검으로 내 폐부를 찌르니, 나는 괴로워하며 잠을 설쳤다. 자다가 뒤척이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머리맡에서 두개골을 옥죄는 고통과 고뇌는 나의 시간 감각을 앗아갔다. 오전 1시에 누워 30분 정도 지났을까, 라며 시계를 보면 새벽 4시가 훌쩍 넘어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단잠도 기척 없이 찾아온다. 고된 인내의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번민은 저 앞으로 달려가 사라진다. 그러고 나면, 표상의 세계가 열린다. 시작은 모호하지만, 끝은 명확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늘 가던 곳이었으나, 그날의 꿈은 여느 때와 같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꿈의 이야기다.


남자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 길 앞에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가 있었다. 남자는 그 사람을 쫓으려 했다. 그 사람이 달리자, 남자도 달렸다. 저 멀리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이 보였다. 앞에 있던 사람이 어느 갈림길로 가는지 보려 할 때, 남자는 큰 바람이 일어서 앞을 볼 수 없었다. 남자가 소리치자, 곧 바람이 그의 말을 마치 알아들었다는 듯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남자가 쫓던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는 그자가 두 길 중 하나로 간 것은 분명히 알았다. 발자국도 없고 남아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남자는 고심 끝에,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그 길을 택해 나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거미줄에 부딪혔다. 마치 산길을 거닐다보면 거미줄 몇 가닥이 얼굴에 붙는 것처럼. 그 길 주위에는 거미가 거미줄을 칠 수 있는 나무라든가 하는 것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허공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거미줄에 남자는 매우 놀랐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남자는 팔을 마구 휘저으며 거미줄을 치웠다. 그리고 그는 침대에 누워 팔을 붕붕 휘두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풍경은 생각나지 않았다.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으레 그렇듯 꿈을 담는 그릇인 기억은 모두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뇌가 과감히 지우고, 중요한 부분은 더 강조하여 규칙성을 찾아낸다. 뇌의 뉴런, 시냅스의 연결망은 더 단순한 구조로 바뀌면서 일반화의 가능성을 높인다. 분명 꿈을 기억에 적재하는 작업에서 내 뇌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수행했을 것이다. 풍경이 생각나지 않은 것은, 풍경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길이 돌바닥인지, 콘크리트인지 기억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둘 중 무엇이든 상관없기 때문이고, 큰바람이 흙먼지를 내 눈에 뿌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건지, 아니면 그 바람 자체가 너무 강해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건지, 마찬가지로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꿈이 전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이 꿈은 내가 생각할 때 꿈이 가진 가장 대표적인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마치 영화의 줄거리만을 글로 간추린 시놉시스처럼 매우 추상화되었고, 현실같이 느낄만한 뚜렷한 인과관계도 없다. 그런 혼돈 속에서도 나름의 규칙은 있다. 꿈의 표본과도 같은 이 꿈에서 깨어나서 처음으로 한 일은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내가 생각했을 때는 나의 고통 그 자체, 혹은 고통을 주는 원인(그것이 실제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어진 길과 갈림길은? 왜 거센 바람은 나의 앞을 가로막았고, 거미줄은 나를 방해한 것이지? 나는 생각할수록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러나 꿈에 대한 다른 해몽을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거창한 까닭은 없었고 그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홀로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고찰을 거듭할수록 어떤 관념들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꿈속의 남자였던 나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고, 내가 왼쪽 길을 선택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과연 내가 오른쪽 길을 선택하고, 거미줄에 걸렸던 때와 같은 시점에 깨어날 수 있었을 것인가? 이는 꿈이 결정론적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세상이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믿는 것처럼, 눈 앞에 있었던 인영을 따라가기로 결정한 것도, 오른쪽 길을 선택한 것도 내가 지금은 깨닫지 못하지만 복잡한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법칙이 그런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조그마한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거대한 기계장치를 구동하듯. 조금 다른 말로는, 그래, 운명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운명론적 공리를 채택하지 않은 세상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왼쪽 길을 선택한 나는 언제 깨어났을 것인가? 꿈에서 깨어날 수는 있었던 것일까?

모순되게도, 모든 것이 의문스러운 생각의 연쇄로부터, 명약관화한 명제가 도출되었다. 내가 추적하던 그 남자는 이 꿈에서 주요하지 않은 요소였다. 그자는 그저 꿈에서 내가 앞으로 가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했다. 그자를 내 고통의 근원이 현현한 모습이라 여겼던 것도 내가 그런 의미를 스스로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꿈은 단순히 나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는 거울 따위가 아니다. 솔직히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앞서 해몽은 보지 않았다고 했으나, 프로이트나 융, 카시러 같은 사람들의 이론까지 감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 빛나는 지성들에 비하면, 내 철학적, 학문적 배경은 쭉정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업적을 반박하기보다는, 난 무의식의 발현, 내면세계의 외침, 상징적 해석 같은 꿈의 원론적인 해석에 그저 동의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나만의 직관이 담긴 추리는 그런 경직된 제약을 벗어났다. 꿈은 더 거대한 것이 담긴 그릇이다.

모든 것은 모두 나의 부질없는 공상이다. 증명되지 않는 한, 영원히 망상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꿈을 다시 꾸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과거에 꿨던 꿈을 이어서 꾸거나, 같은 꿈을 다시 꾸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운이 좋다면 한두 번씩 그럴 수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시도해서 성공했다는 사례는 세간에 떠도는 허황된 글 말고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책부터 시작해서 논문, 웹에 떠도는 모든 글까지, 자각몽에 대한 글을 탐독했다. 글쓴이가 저명하든 아니든, 글의 수준이 전문적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자료를 총동원했다. 그렇게 두어 달을 투자했으나, 모든 방법에 실패했다. 나는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예전에 처방받았던 향정신성의약품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별다른 효과가 없었기에 금방 끊었지만, 그만큼 간절했다는 내 맘을 알아달라.

그런 절실함이 나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조잡하고 비과학적으로 보이던 자각몽 기법이 실제로 동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로소 나는 원하는 꿈을 꾸었다. 완전히 같은 꿈은 아니었다. 내가 쫓던 그 사람은 이번 꿈에 등장하지는 않았다. 현실에서 나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실제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몇 달간 이 일에만 매달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나의 뇌리를 침습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좋은 일이었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갔다. 이것이 자각몽의 효과인지는 불확실하나, 전에 꿨던 꿈에서 느꼈던 감각과는 사뭇 달랐다. 훨씬 더 생생하고 현실감 있고, 나에게 밀착한 느낌이었다. 흡사, 불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십자 형태로 번진 빛을 보다가, 창문을 열어 있는 그대로의 야경을 목도하는 기분이었다. 꿈에서 이런 낯선 기분을 느끼니, 상당히 기이한 고양감이 가슴에 들어찼다.

나는 하염없이 길을 걸었다. 내가 걸었던 그 길이 이렇게 길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 내가 꾸었던 꿈과 다른 꿈이면 어찌해야 하는 것일지, 걱정도 앞섰다. 그러나 초조한 감정은 이내 가라앉았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논문 출판 따위의 학술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엄격한 검증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상념이 떠오를 무렵, 이윽고 눈 앞에 두 갈림길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른쪽 길에는 아른거리는 줄 몇 가닥이 눈에 걸렸다. 광원의 위치는 전혀 모르겠지만, 빛살에 하늘거리는 거미줄의 광택이 마치 윤슬처럼 보였다. 나는 확신했다. 이제 의심 같은 방해물은 접어둘 때라고. 나는 서둘러 왼쪽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제야, 내 주위의 배경이 온통 하얀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내가 길을 걸어올 때까지만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똑똑히 인식되었다. 내가 서 있는 세갈래 길은 누군가 작도를 해놓은 것처럼, 360도를 삼등분하여 120도의 균등한 각도로 나누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길은 흙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하얀 도화지에 그저 황갈색 염료를 칠해놓은 것처럼 보였다. 이 하얀 세상을 둘러보면서도, 내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정확히는 멈출 수 없었다. 다리를 움직이는 내 육신은 멈추고자 하는 내 의식의 명령을 거부했다. 역설적이게도, 이곳은 꿈속이었기 때문에 발걸음을 옮기는 육신조차 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고로 이는 내 의식 속에 정신이 온전히 관장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암시다. 물리적인 육체를 오로지 정신만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한다. 나의 심장박동, 호흡, 척수 반사 등 무의식에서 생존을 위해 내 의도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신체가 반응하고 행동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그러나 정신은, 내 마음은 다르지 않은가? 세로토닌이나 다른 신경전달물질의 과다 혹은 결핍으로 인한 정신적 질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한결 추상적인 이야기이다. 이제까지 난 내 꿈이 보여주는 세계는 나의 뇌로만 이루어진 고립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가 시사하는 바는, 내 꿈에 외부 세계의 영향이 미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내 정신은 부유했다.

여기서부터는 말로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편린만을 불완전한 단어 몇 개와 문장 몇 개에 욱여넣을 수 있을 따름이다. 미약하지만 지금부터 짧게 그 경험의 정수를 담아내 보고자 한다. 나는 세포, 원자, 양성자, 쿼크같이, 만물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기본 구성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태양계, 은하, 은하단과 거대한 우주 구조, 그리고 우주 전체까지, 그 구성요소가 물리학이라는 만물의 규칙에 따라 조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었다. 나는 인간이라는 지적 존재 하나하나의 인생, 자연에 존재하는 동식물과 미생물, 박테리아부터 바이러스까지,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생물, 흔히 외계인이라 불리는 지구 밖 존재들의 삶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대한 중력에 사로잡혀 궤도에 돌입하기 직전의 슈메이커-레비 혜성과 그 충돌을 기다리는 목성. 세렝게티 초원에서 가젤을 사냥하는 사자와 포식자에게서 도망가려고 발버둥 치는 피식자. 은하의 중심에서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모든 것을 탐식하는 블랙홀과 그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빛의 광자. 심지어 나는 사랑과 삼각형, 초입방체(Hypercube)와 실패, 시간과 공간 같은 수학적, 추상적 개념조차 체감했다. 마치 내가 그 개념 자체가 되어버리듯, 그런 것들은 나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어, 나의 심상 자체를 완전히 비틀어버렸다. 입에 발린 말로 우리의 상상력은 무한하다고 하나, 이런 것들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우리의 뇌세포는 제한적이고, 무한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정은 나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길을 보여줬다. 찰나였지만 영원했고, 영겁의 세월이었지만 순간이었다. 그리고 인생처럼, 그리고 처음 시작했던 그 꿈처럼 모든 여정에는 선택지가 존재했고, 그 선택지는 또 다른 여정이면서, 곧 세계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덮쳤다. 그나마 찾은 단어를 사용하자면, 숭고, 경이로움에 압도되어 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본 것들은 당연하게도 진정으로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은 유한하지만 무한성이라는 의미를 일부 간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우주는 무한하지만, 그 무한성은 내 유한한 감각으로만 수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존재가, 나의 정신이, 나의 의식과 사고가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무한이 바다라면, 우리는 유한이라는 병에 담긴 바닷물을 맛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랙탈, 영원회귀와 윤회, 알레프와 극한, 재귀성이나 자기 참조, 무한 루프같이 진부한 개념으로 우리는 무한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려 끊임없이 노력하고, 예술과 학문, 정신의 세계에서 무한을 찾으려고 몸부림친다. 우주 자체를 제외한 현실의 모든 것은 유한하지만, 우리는 무한을 향한 끝없는 동경과 상상의 여정을 멈추지 않는다. 유한한 존재이기에 무한을 갈망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응당 인간의 조건이 아닐까? 다만 난 그런 관념의 상한을 넘어서는 것의 단편을 맛본 것이다. 인식은 내가 가진 한계에 의해서 정해지지만, 무한성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문을 통해서, 유한 그 너머에 있는 무한을 보는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유한한 것들뿐이겠지만 그 이상의 무한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목도한다.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감정과 경험, 지식과 지혜는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나는 우습게도 현실의 나를 떠올렸다. 현실에서는 그저 인생의 격랑을 견디는 것뿐, 가치 있는 삶, 가치를 창출해 내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가 방금 체험한 세계는 현실의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일말의 파편조차 떠올릴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방법이 내게는 글이었다. 꿈에 들어오기 전의 세계에서 나는 소설가는 아니었지만, 세상을 창조하는 그들을 동경했고,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그 생각은 존재함과 동시에 세계를 침식했다. 어느새 내 눈 앞에는 펜과 공책이 있었다. 난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갔다. 현재 쥐고 있는 펜과 글자가 술술 적혀나가는 종이가 어디서 난 것인지, 당최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난 그저 이 흐름에 몸을 맡겼다. 윌리엄 워즈워스가 했던 말은 과연 진리에 가까웠다. '꿈과 책은, 각자 하나하나가 세계이다.' 그리고 난 그 둘을 한꺼번에 실현했다. 꿈은 그야말로 세계가 되어 나를 에워쌌고, 이를 바탕으로 내가 글을 씀으로 인해서 또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켰다.

인간은 다른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매개체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글은 그런 매개 중에서, 내가 아는 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효과적이다. 내가 적은 글은 내가 탐험한 세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만 나는 이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나의 체험을 같이 체험하고, 내 깨달음을 같이 깨닫고, 내 세계를 탐험하며, 경탄하고, 감동하며 매혹되길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 아니겠는가! 나는 내 등줄기에 흐르는 섬광, 그 전기신호의 전자 하나하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전율했다. 마치 필사를 한 것처럼, 내가 쓴 글은 모두 기억에 옮겨 적혔다. 글자 하나하나가 뇌리에 각인되어 아로새겨진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하나의 깨달음이 내 정신을 관통했다. 글, 언어와 우주는 단순히 비유적 표현 말고도 구조적으로도 매우 닮았다. 문법이라는 규칙에 따라서 글자가 모여 단어가 되고, 단어가 배열되어 문장을 이루며, 문장이 나열되어 글을 구성하듯, 우주도 글자와 같은 구성 요소가 물리법칙 등의 문법이 이끄는 대로 물질과 현상을 구현한다. 이 둘의 관계는 우리가 언어라는 것을 발명할 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 이 사실을 깨닫자, 꼭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포근한 만족감이 온몸을 감싸안았다.

나는 이제 진리를 담고 있으면서도, 실체가 없는 세상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난 얼른 잠에서 깨고자 했다. 그러나 깊이 잠들어 있는 육신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깨었는지도 몰랐다. 정말 최악에는 영원한 잠에 빠졌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리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꿈이 이제야 진정으로 현실의 종속에서 벗어나서 독립된 세계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라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꿈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내가 죽으면 이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가 받아들인 세계, 그 세계를 기반으로 내가 만들어 낸 세계는 그저 한 줌의 모래에 불과할 것인가?

이제 시작의 끝이 보인다. 나의 논리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어떻게 내 꿈은 내가 가진 상상력을 벗어나 무궁무진한 세상을 구현했을까? 나라는 개체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어찌 초월하였을까? 그리고 그 초월적인 공상은 놀랍게도,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내게 독창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영감을 주는 것으로 거듭났다. 꿈은 문이다. 자유롭기는 하나, 비좁아 터진 공간으로의 문이 아니라, 자유로우면서도 무한한 우주로의 문이다! 우주는 우리의 만물, 삼라만상과 시간을 품고 있는 무한한 공간의 총체이다. 우리가 상호작용을 할 수 있고, 관측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우주인 것이다. 따라서 만약 꿈에서 너무나도 생경하여 우리의 우주와 완전히 다른 우주라고 생각되는 세상을 보더라도, 사실은 그 세계마저 우리가 사는 우주에 포함되고 있다. 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다른 시공간으로의 매개이자, 관문이며 내면세계 이상의 의미를 가지므로, 창발처럼 우리 뇌가 가진 근본적인 사고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꿈은 문이자, 세계일 뿐만 아니라 본질은 구슬과도 같은 모습일 것이다. 흡사 인다라망처럼 사람들의 무의식은 우주와 동화되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다. 그 그물에는 꿈이라는 구슬이 매달려있고, 이 꿈은 다른 모든 구슬을 비추며 동시에 다른 모든 구슬에 투영된다. 꿈과 현실은 갈라져서 다른 세계로 분리되지만, 완벽히 격리되어 있지는 않다. 내가 그 산증인이다. 자각몽이든 예지몽이든, 현실은 꿈을 만드는 재료의 일부가 되고, 꿈은 현실에 영향을 준다. 결국 꿈의 세계 또한 현실처럼 우리의 우주에 포함된다. 마치 술과 물처럼, 비슷해 보여도 둘의 성질은 판이하다. 그럼에도 둘은 우주라는 거대한 하나의 범주 아래에 존재한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 그리고 물리적 우주와 무관하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새로이 개척된 우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우주는 나라는 개인 말고도 모두의 꿈, 모두의 무의식, 모두의 세계를 총망라한다. 고로 모든 이의 뇌는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단말기나 그곳으로 향하는 문이 될 수 있다. 그러니 현실에서 내 글을 출판하는 것과 이곳을 탐험하며 내 글을 현실에서 꿈꾸는 이들이 불 수 있도록 무의식의 바다에 띄우는 것은 무엇이 다르랴! 심지어 실체적,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더 월등하다.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없이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 무한한 세계에서는 어떤 사건이라도 반드시 일어나기 마련이다. 마치 무한한 수의 원숭이가 무한한 시간 동안 아무렇게나 타자를 쳐서 알파벳을 배열해도 렘과 보르헤스가 쓴 명작을 필연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최후에는 모든 이가 나의 글을, 나의 세계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에게 고한다. 꿈을 꾼다는 것은 세계를 창조하고 우주를 확장하는 일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꿈에 등장하는 신기루가 쓴 글을 읽는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그대가 내 꿈 속의 인물이어서, 그대는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 대번에 흩어질 잔상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당신 혹은 나, 아니면 우리 모두 바스러져서 바람결에 흩날릴 모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나는 이 한없이 넓은 우주에서 길을 잃지 않은 채로 방랑하니, 이 글은 탐험가의 자전적 소설이며,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고, 무궁한 세계에서 길을 헤맬 이를 위한 안내문이다.

(하략)

끝